[Article]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고통스러웠던 약물 중독 by 다음엇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고통스러웠던 약물 중독
(Lucy Maud Montgomery's agonizing drug addition)


몽고메리가 남긴 일지들은 <빨강머리 앤> 저자가 처방받았던 약물의 중독의 심각도가 최근의 마약성 진통제(opioid) 위기와 유사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앨러나 미첼 (2/12, 2020)
매클린스

Lucy Maud Montgomery in front of "Journey's End",
ca.1940. Toronto, ON. Courtesy of L. M. Montgomery


지금도 온타리오주 노발(Norval)에 위치한 빨간 벽돌집은 위엄있는목사관으로서 이완 맥도널드가 봉직하며 주일마다 설교했떤 장로교 교회의 눈길을 끄는 첨탑에서 가까운 곳에 100년 전 그대로 서 있다. 교회 성소에는 맥도널드와 그의 유명한 배우자 루시 모드 몽고메리를 기념하는 커다란 명판이 서 있다. 그는 <빨강머리 앤>을 썼다.

그러나, 토론토 바로 북쪽에 위치한 이 목가적 배경의 멋진 집에는 오랜 기간 숨겨온 비밀이 있었다. 맥도널드와 몽고메리는 불안증, 신경증, 불면증 처방을 위해 당시 의사들이 처방했던 신경안정제(barbiturates, 진정제, 최면/환각제)과 브롬화물(Bromides, 진정제)에 중독적으로 의존하던 환자였다. 몽고메리는 그들이 복용했던 약물과 그에 따라 수반되어 급격하게 진행되는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나쁜 방향의 부작용들에 대해 꽤 많은 내용을 일기에 남겼다. 몽고메리는 1942년에 유가족들이 언급한대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자살했다. 부검은 진행되지 않았으며 향년 67세였다.

"그들은 바르비투산염을 복용했을겁니다... 그리고 복용얄을 늘려갔어어요. 그게 잘 듣지 않자, 브롬화물을 한 수픈 첨가했고 결국 이마저도 효과가 없었을 때, (몽고메리는) 그 당시의 범용 약물을 지갑에 넣고 다녔습니다. '브랜디'였죠. 힘들 때마다 한 모금씩 마셨을 겁니다." 구엘프 대학교의 메리 헨리 루비오(Mary Henley Rubio)의 말이다. 그는 2008년 <빨강머리 앤> 출간 100주년에 30년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출간된 그의 전기에서 이 부부의 약물 사용에 대해서 처음으로 탐구했다.

그들의 불행한 이야기는 오늘날의 마약성 진통제 유행의 충격과 공명하는 바가 있다. 두 경우 모두 약을 처방받은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마약성 약물에 중독되어 버렸고, 그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 의사들에 의해 초래되었다. 특히 캐나다인들에게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몽고메리가 국가를 대표하는 사랑받는 아이콘일 뿐만아니라 캐나다가 마약성 진통제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나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2017년 캐나다의 처방약 과다복용 사망의 주범 중 하나인 옥시코돈(oxycodone, 진통제) 사용량은 국제마약감시기구(International Narcotics Control Board)에 따르면,무게 기준으로 미국 전체 사용량에 버금간다.

몽고메리의 손녀인 케이트 맥도널드 버틀러(Kate Macdonald Burtler)는 가족들이 조부모의 약복용을 알고 있었지만 이야기하는 것을 피했다고 밝혔다. "할머니는 분명히 과다복용자였어요." 케이트는 몽고메리의 끔찍한 체험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 협의(L.M. Montgomery Institute) 창립자이자 프린스 에드워드섬 대학교의 총장을 지냈던 엘리자베스 에펄리도 그렇다. "최고 수준의 영민한 사람도 잘못 처방된 약과 오용으로 망가잘 수 있어요. 몽고메리는 그 자신을 사람들의 영혼과 슬픔을 치유하는 사람으로 생각했었죠. 그의 어둡기만했던 시간들과 깊은 고통이 다른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어울리는 일인가요."

예를 들어, 1926년부터 남편 이완이 은퇴하는 1935년까지 노발에서 살았던 시절에 몽고메리는 남편이 종종 불안상태에 빠져 설교를 위해 바로 옆 성소로 가는 도중 쓰러지지 않도록 집에서 양조한 포도주 한 잔을 먹였다고 쓰고 있다. 루비오 박사가 일지에서 집계한 바에 따르면, 정신이 혼란스럽고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의 몇 번의 심각한 신경쇄약 증세를 경험했고, 그 때마다 엄청난 양의 약 처방을 받았다.

몽고메리는 1937년 부부가 토론토로 이주한 이후의 비참했던 장거리 자동차 여행을 묘사하고 있다. 온타리오의 리스크데일의 교회에서의 설교를 위해 초청되었던 맥도널드는 너무 불안해하며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의 손의 경련이 너무 심해서 컵을 들 수도 없었다. 설교문을 읽기에 너무 멍해져서, 착석하기 전의 설교단 앞에서 옹알거릴 뿐이었다. 그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의사는 그의 "완연한 신경 쇄약"을 다루기 위해서 더 많은 양의 브롬화물을 처방한다.

몽고메리의 경우는, 그 스스로 바르비투르 계열의 신경안정제와 브롬화물의 목록이 길어지며 사용량이 늘어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남편인 이완은 새로운 의사들로부터 더 많은 처방전들에 따라 더 많은 약을 사들였고, 그들의 침실과 욕실 수납장은 약들로 가득찼다. 그는 그가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썼다. 그는 환각과 무서운 악몽들에 잠식되며 빠른 속도로 살이 빠져가는 것에 경악했다.

어느 순간, 그의 의사이기도 했던 그의 아들 스튜어트 맥도널드는 어머니의 상태가 걱정되어 혈액 샘플을 채취했었다고 루비오 박사에게 말했었다. 브롬화물이 검출되었고, 그는 어머니에게 복용을 중단할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몽고메리는 그럴 수 없었다. 생의 끝에 다다른 무렵, 몽고메리는 그 약들 중의 한가지인 피하 주사(hypo, hypodermic injection)를 맞지 않고는 일을 할 수 없다고 썼다. 그의 마지막 날 오후에, 마지막 원고를 포장해서 출판사에 보내고 눈을 좀 부치기 위해 약의 힘을 빌었고 결국 사망했다. 그의 많은 팬들에게 가슴 저미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밝혀진 지식에 비추어 본다면, 전문가들은 처방약에 중독되어 옴짝달싹 못 하고 있는 부부를 보게 된다. 오타와 소재의 약물 자용 중독 센터의 연구자이자 정책 분석가인 사라 코네팔(Sarah Konefal)은 지적한다. "저에게는 그게(일지에 정리되어 있는 사례들) 바르비투르 유도 중독의 사례 연구처럼 들리네요."

토론토 대학 의대 총장인 에드워드 쇼토 교수는 바르비투르 유도성 약물들은 1903년 대중화 되면서 신경계 질병의 치료법을 변화시켰다고 말한다. 일단 시장 나오게 되자, 의사들이 이 약물들이 중독성이 있고, 치료가 되는 복용량과 치사량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을 썼던 에드워드 쇼터(Edward Shorter)에 따르면, "바르비투르 유도 약물은 발길에 채이는 풀처럼 흔하게 사용되었다."

그 당시 몽고메리는 처방약 오용의 특별한 사례가 아니었다. 그가 사망하고(1942), 몇 년 더 지난 40년대 후반까지도 특히 미국에 널리 퍼진 바르비투르 유도성 약물의 대량 소비는 큰 우려를 가져왔고 최초의 '만성 바르비투르 약물 중독'대한 임상 연구가 시작되었다. 50년에 신경과 정신의학 기록 보관소에서 발표된 이 연구는 병원 입원 환자들 중 독성 물질에 의한 사망의 25%가 바르비투르 약물의 과도 사용에 따른 것이었음을 밝혀 냈다. 이 연구는 과도 복용의 부작용으로 맥도널드와 몽고메리가 경험했던 것과 아주 유사한 증상들인 혼란스러움, 몸의 심한 떨림, 정서적 불안증, 망상, 우울증 등을 분류하여 보고하고 있다. 이 연구는 바르비르투르 유도성 약물은 거의 모든 의미에서 중독성이 있고, 장기 복용은 사용자와 사회 모두에 큰 해악을 미친다고 결론짓고 있다.

19세기 중반에 도입된 브롬화물은 바르비투르 유도체와 마찬가지로 중추 신경계를 억제해서 뇌에서 정보가 처리되는 방식을 둔화 시킨다고 토론토 대학의 법의학자이자 독성 전문가인 비비안 루크(Vivienne Luk)는 설명한다. 내과의들은 치료에 쓰기 시작한 이후 수십년동안 정신적 병폐를 가져오는 부작용에 대해 이해하지를 못했다. 과용의 증상은 성격 변화, 환각, 망상 등이 포함될 수 있다.

90년대 말에, (또다시) 옥시코돈과 같은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하는 경향이 본격화되었다. 토론토 대학의 법의학 독성학 교수인 카렌 우달(Karen Woodall)은 제약회사뿐 아니라 의과 대학에서 조차 의사들에게 약물에 중독성이 없다고 확신시켰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오피오이드가 중독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이전에 이미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 약에 의존하지만 얻을 수 없는 일부의 환자들이 그들의 고통을 덜어 줄 마약성 진통제 처방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장소들을 찾기 시작했는데, (캐나다) 정부 규제가 억제하고자 하는 관행이다. 실례로 캐나다의 많은 병운들은 현재 마약성 진통제의 처방을 거부하기 때문에, 약의 처방전을 받을 수 없을 때 몇몇은 고의로 부상을 입어 응급실에 나타난다. 다른 이들은 종종 매우 치명적인 펜타닐(fentanyl)에 오염된 불법 약물 공급처를 찾는다.

2016년 이후, 약 14,000명의 캐나다인들이 정상적인 처방과 시중에서 불법으로 취득한 마약성 진통제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캐나다의 최고 공중 보건 책임자인 테레사 탐(Theresa Tam)은 이를 캐나다가 지난 수십 년 동안 겪었던 것 중 가장 심각한 공중 보건 위기라고 불렀다. 캐나다 통계청은 캐나다의 기대 수명이 마약성 진통제 중독으로 인한 사망자가 너무 많아서 정체되었다고 보고한다. 5개 주들이 협력해서 마약 제조업자들을 상대로 집단 소송을 벌이고 있지만, 높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오피오이드 사용이 늘고 있다.

몽고메리가 사망한 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우달 교수는 많은 처방약들이 몽고메리와 맥도널드가 복용했던 바르비투르 유도성 약물과 브롬화물보다는 안전하다고 말한다. 정신 건강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도 좀 더 사회적으로 받아들여 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어떤 발전도 오피오이드 중독사라는 전염병을 막지 못했다.

우달 교수는 "앞으로 두 걸음 나가면 또 뒤로 한 걸음 후퇴합니다."고 말했다. "의사들이 더 많이 알게 되었고, 처방된 의약품에 대한 안전 조치가 강화되었지만 마약성 진통제에 따른 위기가 발생했어요."

몽고메리의 약물 복용에 대한 퍼즐을 맞추었던 전기를 썼던 루비오 박사는 이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는 온타리오 노발의 목사관 옆에 있는 관리인의 오두막집에서 바나나빵을 입에 물고, 몽고메리가 살았던 목사관에 박물관을 열 계획이다. 평화로운 크레디트(Credit) 강 위의 찬란란 파란 하늘 위로 캐나다 거위 한 마리가 끼룩거리며 날아간다. 몽고메리는 이 곳에서 다섯 권을 소설을 썼다. 자신의 정신 건강과 묵묵히 싸워가면서도 이 곳을 마음에 들어 했다.

당시 의사들이 병증에 도움이 되도록 처방했던 수많은 약품과 그에 따른 부작용등을 포함한 내용들은 몽고메리 탄생 150주년인 2024년에 박물관 개관과 함께 전시될 예정이다. 루비오 박사는 이를 마약성 약물의 부작용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누군가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경계의 이야기(cautionary tale)라고 부른다: "이건 역사적으로 중요합니다. 미래를 위한 경고가 될 겁니다."

덧글

  • 로맨티스트 2020/02/18 12:52 # 답글

    번역으로 쉽게 정보를 캐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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