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週忌] 루시 모드 몽고메리에 대해 당신이 몰랐을 75가지 것들 - 3 by 다음엇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75주기를 맞이하여 캐나다 CBC에서 정리한 "루시 모드 몽고메리에 대해 당신이 몰랐을 75가지 것들"을 다시 정리해 본 세 번째 포스트입니다.
토론토 시절, 말년의 몽고메리 (촬영/사인 날짜 모두 알려져 있지 않음)

43. 몽고메리는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습니다: 장남인 체스터(Chester)는 1912년에, 세째인 스튜어트(Stuart)는 1915년에 태어났습니다. 차남인 휴(Hugh)를 마음에 묻은 것은 1914년의 일입니다. (오른쪽은 1917년 사진으로 체스터가 5살, 스튜어트가 2살 때 입니다)

44. 몽고메리의 작품은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45. 섬에서 장기 공연 중인 <빨강머리 앤: 뮤지컬 (Anne of Green Gables: The musical)>은 '가장 오랫 동안 매년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longest running annual musical theater production'으로 기네스북에 올라있습니다. 2014년이 50주년이었죠. (아래 사진이 17대 앤 뮤지컬 주인공이자 50주년 공연을 치룬 캐티 커(Katie Kerr)입니다. 인터뷰에서 늘 할머니와 함께 셜리 템플(Shirley Temple) 영화를 보면서 배우로서의 꿈을 키웠다고 했었죠. 현재는 작년부터 '맘마 미아'의 주인공인 소피(Sophie)역으로 샬롯 타운 극장에서 공연하고 있습니다)

46. <빨강머리 앤>은 1909년 스웨덴어로 처음 번역되었습니다.

47. <빨강머리 앤> 출간 100주년이 되던 해에, 몽고메리의 손녀인 케이트 맥도널드 버틀러(Kate Macdonald Buttler)는 '글로브 앤 메일(The Globe and Mail)誌'에 가족들은 몽고메리가 자살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48. 맥도널드 버틀러는 할머니의 정신 건강에 대한 오명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해서 가족들의 비밀을 공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몽고메리는 평생 불안증으로 고통받았습니다. 남편인 맥도널드 역시 결혼 이래로 불안증을 앓았고, 몽고메리에게 고통을 더 했죠... 

49. 의사였던 아들 스튜어트 맥도널드는 침대 맡에서 메모가 적힌 쪽지를 발견합니다: "주님 저를 용서하소서 그리고 여러분 모두가 나를 용서해 주기를 바란다. 비록 나를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내가 처했던 상황은 너무 지독해서 견딜 수 없었고 아무도 실감할 수는 없을 거야. 아 이게 내 인생을 끝이란 말인가 나는 항상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비록 적지 않은 잘못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평생 그를 연구해 오고 있는 바친 구엘프 대학의 메리 헨리 루비오(Mary Henley Rubio)는 전기인 <Lucy Maud Montgomery: The Gift of Wings>에서 몽고메리는 말년에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고 결국 약물(바르비투산염, Barbiturates)에 의존하게 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루비오 선생은 남겨진 쪽지가 유서(suicide note)는 아닐 것이라고 봅니다. 그 보다는 그의 10번째 "인생기록(lifebook)"의 초안의 마지막 페이지 였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 쪽지는 죽기 이틀 전에 씌여졌고, 분명하게 '176' 이라는 페이지 숫자가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블로그에 관련 내용(47~49)이 포스팅되어 있지요. 저도 루비오 선생과 마찬가지로 사고사로 보는 입장입니다. 몽고메리가 복용했던 것은 아마 바이엘이 출시했던 베르날이나 "정신의 아스피린"으로 불렸던 루미날일 겁니다. 당시 '불안'과 '우울'은 아직 공식적인 병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경쇠약(또는 '신경 문제'), '긴장', 불면증 등의 치료제로 처방이 되었습니다. 40년대 중반에는 이미 서른가지가 넘는 바르비투르산염이 다른 상표명들로 팔리게 됩니다. 아미탈(아모바르비탈), 넴뷰탈(펜토바르비탈), 세코날(세코바르비탈)등이 대표적으로 처방되던 약들입니다. 그런데, 바르비투산염의 가장 큰 문제점 두가지는 중독성이 높았고, 실수로 과용하게 되었을 때 치명적이었습니다. 실제로도 1950년에 미국에서 이 약의 과용으로 죽음에 이른 사람이 통계 상으로도 1000명이 넘습니다. 60년대의 마릴린 먼로의 사인도 이 바르비투산염의 과용입니다. 심지어 바르비투산염은 '진정제'로도 약국에서 쉽게 구살 수 있었죠. 루비오의 전기에서 약물 이름을 접하고 자료를 찾아 보던 중에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책은 스콧 스토셀의 <나는 불안과 함꼐 살아간다> 입니다.)
2014년 샬롯타운(Charlottetown)의 컴페더레이션 예술 센터(Confederation Centre of the Arts)에서
Anne 역으로 분했던 캐티 커(Katie Kerr)

50. 초록색 지붕집(Green Gables)은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방문지로 매년 수천명의 사람들이 찾아 갑니다. 
51. <앤> 시리즈의 마지막인 <블라이스 가족 이야기(The Blythes Are Quoted)>는 2009년에 유작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의 뉴욕 타임즈의 부고에 따르면 원고가 죽기 하루 전에 출판사에 전달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원래 대로라면 9번쨰 시리즈로 세상에 나올 예정이었습니다. 앤은 결혼하면서 성이 남편을 따라 블라이스로 바뀌었고, 아이들 역시 모두 블라이스이기 때문에 바로 블라이스 가족들의 입을 통해 말해지는 자신들의 이야기인 셈입니다. 그래서 'Quoted'이죠. 실은 이 책은 이미 74년 아들 스튜어트에 의해 <Road to Yesterday>라는 세상에 나온 적이 있고 역시 일본에는 번역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튜어트가 불편한(?) 내용들을 상당 부분 삭제했기 때문에 2009년에 나온 벤자민 르페브르板이 제대로된 완전판인 셈이죠. 블로그에 몇 가지 글이 있지만 이 포스팅을 참조하세요.)

52. 몽고메리가 학교에 들어갔을 때 처음 하루 이틀 놀림을 당했던 충격이 컸던 것 같습니다. 겨울의 어느날 처음 학교에 갔던 날 새로운 스타일의 에이프런(apron)을 입고 갔을 때 "갓난애 에이프런" 이라고 놀림을 받고 수치심을 느꼈고, 둘 째 날은 지각을 해서 당황한 나머지 모자를 쓴 채로 자리에 앉는 바람에 교실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모욕감에 모자를 벗으며 그 때의 심정을 몽고메리는 "산산조각난 인간 성 한 조각(a crushed morsel of humanity)"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역시 그의 자서전 <험한 길(The Alpine Path)>의 3장에 나옵니다)

53. 몽고메리가 15세 되던 때에 1년여 동안 새스크캐처원의 프린스 앨버트로 가서 아버지가 재가한 곳에서 1년여를 살았습니다. 계모와 아버지와의 생활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해서 결국 섬의 외갓집으로 돌아오게 되죠. 거기서 그는 "서쪽의 에덴(A Western Eden)" 이라는 에세이 한 편과, "유월(June)"과 "프린스 앨버트에서의 시절(in the Prince Albert Times)" 두 편의 시를 발표했습니다.

54. 1935년, L.M. 몽고메리는 대영제국의 4급 훈장인 대영제국 훈장 장교(Officer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 OBE)를 수여받았습니다.

55. 1930년대 캐나다 작가 협회(the Canadian Authors Association) 이사로서 몽고메리는 그의 명망을 캐나다 문학과 작가들을 육성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30년대 토론토로 옮긴 이후에 CAA의 임원이라는 자리는 그에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 안에서의 활동과 동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많은 위안과 즐거움을 받았습니다)

56. 1924년, <The Toronto Star>는 " 누가 캐나다에서 가장 위대한 12명의 여성들이냐 (Who Are the Twelve Greatest Women in Canada?" 라는 조사를 발표했고 몽고메리는 그 중 한명으로 뽑혔고, 일기에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루비오 선생의 전기 중 'Leaskdale Years" 13장 끝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기존의 일지 선집에서는 읽을 기억이 없는데, 곧 나올 20년대를 정리한 완전판 일지를 기다려 봐야겠습니다)

57. 무라오카 애리의 기억에 따르면, 무라오카 하나코는, "몽고메리와 만날 수 있었다면, 아마 우리는 마음의 친구(bosom friend)가 되었을 게야"라고 한 적이 있다는 군요.

58. L.C. Page Company와의 계약이 만료된 후, 몽고메리는 존 맥클란드(John McClelland)를 새로운 출판 및 문학 대리인으로 선택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10여년의 법정 공방의 시작이었습니다. 

59. 영화 "노트북"으로 유명한 레이철 매캐덤스(Rachel McAdams)는 2016년 <빨강머리 앤> 오디오 북의 내레이터를 맡았습니다.

60. 가장 최근의 <빨강머리 앤>의 영상화는 CBC가 제작하고 넷플릭스가 글로벌 배급을 하는 <앤(Anne)>으로 아일랜드 배우인 에이미베스 맥널티양이 주인공을 맡았습니다.


61. 윌리엄 왕자비인 캠브리지 공작부인이 <빨강머리 앤>의 열광적인 팬이라는 것이 알려져 있습니다. 캠브리지 공작부부가 2011년 캐나다를 방문했을 때 섬의 샬롯타운에서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배우들을 방문했었습니다.

62. 어느 여름날 오후, 교회에서 소풍을 갔을 때, 몽고메리의 두 번 째 남자친구였던 윌 프릿카드(Will Pritchard, 길버스 브라이스의 영감이 되었던)는 둘의 이니셜을 '소녀 호수(Maiden Lake)'라고 불렀던 장소 근처의 나무에 새겼다고 합니다. 애석하게도, 100여년이 지나면서 개발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장소와 나무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63. 몽고메리가 다녔던 캐번디시의 학교 건물 근처에는 작은 가문비나무 숲이 있었습니다: "나의 천진난만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아름답고 낭만적인 요정의 왕국이 었다...그 숲은 교실 책상에 앉아 배운 공부보다 내 삶에 더 탁월한 교육적 영향을 끼쳤다." (역시 그의 자서전 <험한 길(The Alpine Path)>의 3장에 나옵니다)

64. 에미상을 수상한 <브레이킹 베드>의 제작자인 모이라 월리-베케트(Moira Walley-Beckett)는 현재 CBC의 새로운 앤 시리즈의 제작 책임자 이자 작가입니다.

65. 모이라 월리-베케트는 앤을 다시 TV 미니시리즈로 만들면서 "앤은 시대를 초월하면서도 현대적입니다.. 너무나도 시의적절한 이야깃거리들이 몽고메리가 만든 이야기 속에 짜여져 있어요"라고 말했죠.

66. 몽고메리의 미국 출판 대리인이 그의 소설 <잉글사이드의 릴라(Rilla of Ingleside)>에 "미국인의 경험"이 부족하다고 했을때, 몽고메리는 간략하고 야무지게 답신을 씁니다: "전쟁 중 캐나다에 대해 썼음 - 미국이 아니라.(worte of Canada at war - not of the U.S.")

67. 몽고메리는 1921년 "캐나디안 독서주간(Canadian Bookweek)"의 기념 강의에서 넬리 맥크룽(Nellie McClung)의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행사의 모토는 "캐나다 작가를 위한 더 많은 독자들(More Readers for Canadian Authors)"였죠. (넬리 맥크룽(오른쪽 사진)은 캐나다의 정치가로 1916년 1월 28일 캐나다의 매니토바주의 여성들이 투표권과 참정권을 쟁취하는 데 핵심적인 혁할을 했습니다. 캐나다에서 처음 쟁취한 권리로 이후 나머지 주들이 차례로 법안을 통과시킵니다. 가장 마지막까지 버텼던 것은 퀘벡으로 여성 투표 권리를 허용한 것은 1940년입니다.)

68. 몽고메리는 9살 부터 평생 일지를 써 왔고, 6년간의 습작을 거쳐 16세 생일이 되던 때에 등단한 십대 작가였습니다. 그의 시 '퍼스곶에서 (On Cape Le Force)'는 1890년 11월 26일에 지역 신문인 <Charlottetown Daily Patriot>에 실렸습니다. 몽고메리는 18990년 12월 7일에 신문을 받아 보았고, 그날 일지에는 활자화된 본인의 글을 본 감격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와,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날이다!...칼럼들 사이에 나의 시가 실려 있었다구! 나는 너무 기뻐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69. 1992년 이래로 몽고메리 학회(L.M. Montgomery literary society)에서는 "반짝이는 두루마리(The Shining Scroll)"라는 이름의 소식지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바다건너 아마추어 학인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글들이지요.)

70. <빨강머리 앤>이 최초로 영상화 된 것은 삼일운동이 있었던 1919년의 일로 무성영화로 만들어 졌습니다. 필름은 모두 소멸되었지만 다행히도 오래된 스틸들이 남아 있습니다.


71. 1919년의 영화배우(메리 마일스 민터, Mary Miles Minter)에 대해서 몽고메리는 일지에 이렇게 인상을 남겼지요: "앤은 아주 곱고(dainty) 예뻐서(pretty) 나의 신중한(gingerly) 앤과는 전혀 달랐다"

72. 몽고메리는 1년 간 달후지 대학에 다니며 문학을 공부했습니다. 등록금은 시골 마을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벌었던 돈으로 지불할 수 있었지만, 외조부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학업을 접고 외조모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73. 청소년기의 몽고메리는 책벌레였습니다.(instatiable reader, 탐욕스러운 만족할 줄 모르는 독서광) 그가 가장 좋아했던 책을 2개 꼽아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마법사 자노니>, 에드워드 불워 리턴2) <운디네>, 프리드리히 드 라 모테 푸케  (에드워드 불워 불턴은 <폼페이 최후의 날>의 바로 그 불턴입니다. 마법사 자노니와 오페라 가수 비올라의 사랑 이야기로 배경은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기입니다. 문학성과 재미로 당시 상당한 베스트셀러였습니다. 오컬트 분야에서는 고전이지요. 푸케의 <운디네> 역시 안데르센과 호프만 등 후대 환상 소설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작품입니다. 몽고메리 본인도 자주 언급한 책으로 앤이 상상하는 나무와 호수와 샘의 요정들의 원천이 바로 이 책에 있습니다. 1901년 8월 23일 그는 일지에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내가 쓰고 싶고 읽고 싶은 아동 도서들은 요란하면서도 무척이나 재미있는 것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 아니 오히려 "즐거움을 위한 즐거움"을 위한 착품이다. 달아 보이는 한 스푼의 잼 안에 음험하게 잠복하고 있는 도덕적인 교훈 같은 것은 빼고 말이다.")

74. 당시의 여류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몽고메리는 유명해 지기 전에 종종 "조이스 캐번디시(Joyce Cavendish)"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곤 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가족과 지인들에게 작가가 되고 싶은 욕망을 숨길 수 있었죠. 결국, "L.M. Montgomery" 로 정착하게 되는데 이는 독자들이 성별을 구분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75. <빨강머리 앤>의 초판은 2009년 소더비 경매에서 $37,500으로 팔렸습니다. 처음 출판되었던 해에는 $1.50으로 팔렸었지요.
2009년 소더비 경매에 나왔던 Anne of Green Gables. Boston: L. C. Page, 1st impression,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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