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곤하고 지루한 오후 유투베를 뒤지다가 새삼스러운 동영상을 다시 봤다. 리흐테르의 슈베르트에 대한 사랑과 리흐테르를 통해 슈베르트를 다시 보게 된 굴드의 대화가 교차 편집되어 있는 몽셍종의 걸작 다큐멘터리. 그 위로는 슈베르트의 G major 소나타가 흐른다. 선배들로부터 비루하고 지루하다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자신을 위해 슈베르트 연주를 멈추지 않았던 리흐테르와 결국 자신을 위해 좋은 음악을 연주한 것이 결국 청중들을 위한 것이 되고 굴드의 가슴을 흔드는 연주를 하게 된다.
정말 오래된 글이 하나 생각났다. 김춘미 선생의 슈베르트와 슈베르트를 듣는 사람들에 대한 대한 이야기... 집에와서 한참을 찾아 헤매던 끝에 다시 찾아낸 문장들이 다시 새삼스럽다. 언젠가의 객석 잡지에서 스크랩해 두었던 것이다.
정말 오래된 글이 하나 생각났다. 김춘미 선생의 슈베르트와 슈베르트를 듣는 사람들에 대한 대한 이야기... 집에와서 한참을 찾아 헤매던 끝에 다시 찾아낸 문장들이 다시 새삼스럽다. 언젠가의 객석 잡지에서 스크랩해 두었던 것이다.
청록의 색채감으로 일관된 흐름
그것이 누구의 작품이든, 어떤 대상을 그것 자체로 완벽하게 안다고 하는것은 참으로 어렵다. 정말 그걸 아는 사람이 있을까?하는 질문도,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하게 된다.아무리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본원적 경험이랄지,혹은 절대적 시작이라는 것을 규명하기가 어렵다.처녀성에 걸맞은 예술적경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으로 마주친 작품일 경우 그것에 대한 반응은 자연의 경치나 생활상의 이러저러한 우발사에 우리가 반응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어떤 보편적 특수질서에 결합되기를 요구하는지도 모른다.그런데 그 질서란 찰나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절대 아니고 서서히 스스로 규명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삶과 사물,꿈 등등으로 우리에게 작용하기도 한다. 또 작품 그 자체로 인해 작용하는 힘 사이에서 당기고, 당겨지는 상대적 힘을 바탕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현실적으로 타당하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에 무감각한채 남아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한편 그 과정의 이면을 깨닫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많은 부분 선택적으로 더욱 쏠리는 단편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마련이다.다시 말해서 작품들은 그것들의 진정한 언어를 듣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에게만 그 언어를 들려주는 것이다.그러나 그러한 사람들도 태어나면서부터 곧장 그 언어를 듣고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는데 문제는 남는다.
이런 이야기를 서두로 꺼내는 이유는 동시대, 예를 들어 슈만과 같이 슈베르트가 자신의 의식을 글로,어떤 글이든 많이 남겼다면 작곡가 슈베르트의 미적 관점을 좀더 잘 해부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이다. 글이 있어도 한사람의 미학 또는 미학 이전의 어떤 상태를 통찰하는 것이 어려운데 슈베르트의 경우 작가 자신의 무엇을 나타내기엔 너무도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다. 그래서 그런지 슈베르트에 관한 여러 종류의 언급은 대부분 수용자측 반응들의 관점에서이다. 단순히 관념적이고 심리적인 언급들에 과학적 논증을 부여하기 위해 한 음악 심리학자가 미국의 한 대학에서 실험을 하였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여러곡 한 학년의 대학생들에게 들려주고 통계를 낸 결과, 쇼팽이나 베토벤,바그너등은 다른 작품간의 작품의 반응편차가 큰 반면 슈베르트는 거의다 푸르른 청록색의 색채감을 토로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슈베르트의 삶의 이면을 볼때 과연 어두운 현실을 뛰어넘어 항상 밝고 청명하게 감정을 걸러내는 것이 슈베르트의 목표였겠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물론 피아노 소나타가 아닌 다른 작품을 들려주면서 나타나는 반응 등, 슈베르트 작품의 전체를 여러층의 수용자들에게 전면적으로 행하는 실험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하더라도 의구심은 여전히 남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슈베르트음악을 사랑하는 이유
슈베르트의 입장은 지금 우리가 변호할 수 없을지 모르나 현재 많은 사람들이 슈베르트의 음악을 좋아하는데 대한 어느 정도의 분석은 가능하다고 본다.슈베르트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그의 멜로디가 마치 자신의 심장으로부터 들려오기라도 하는 듯이 들으며,마치 푸른경치처럼 그렇게 바라보는 마음으로 좋아한다. 여기서 슈베르트의 음악은 그것이 행사하는 작용효과와 어우러지며, 여기에 있어서의 작용효과는 작품자체의 것이라기보다는 작품이 '들려주는 것'의 효과라고 본다. 아무튼 슈베르트의 음악미는 모든 것이 선율에서 파생된다. 그의 음악에서 선율이 빠지면 남는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선율은 음악의 어느 요소보다도 우리 사고의 이미지와 직결되어있는 요소다. 슈베르트에게는 선율이 있고 그래서 어느 작가보다도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그의 세계에 빨리 친밀감을 가지게 된다.
예를들어 스케치를 포함해서 남아있는 슈베르트의 교향곡10작품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미완성 교향곡'을 생각해보자. 미완성은 1악장 첫부분의 드라마틱한 서주부분 때문에 기억되지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곧 등장하는 대화체의 멜로디 때문에 미완성을 사랑한다. 스케르쪼의 피아노스케치가 남아있고,오케스트라용 총보도 두 페이지가 남아 있지만 그는 전조에 있어서 매듭을 풀지 못하는 문제점을 안고 거기에서 작업의 펜을 놓게 된다. 필립래드 클리프라고 하는 학자는 '멜로디만으로 작곡가가 왕국에 들어 갈 수 없다'라고 전제하면서 슈베르트를 멜로디를 만드는 작곡가로 치부하는 것은 그가 대곡을 쌓아올릴 힘이 없는 작곡가로 몰아치는 자세와 마찬가지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공격한다.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나 상대적으로 비교를 해볼 때, 역시 그는 멜로디가 먼저 가는 작곡가라는 일면을 무시할 수가 없다.슈베르트의 많은 가곡들이 인간의 내부에 있는 서정적 요소와 연극적 요소를 언제나 서로 상반되는 방향으로 끌어가려고하는 경향도 보이고, 그에 따라 선이 살지 않는 극적 상황만 남는 작품도 있지만 역시 전체의 경향은 선중심으로 흐르고 있다.
예를들어 슈베르트의 가장 연주되지 않는 작품이면서 그의 교향곡을 능가하는 미사들을 살펴보자.교향곡에서 자칫 형식에 충실하기 위해 경직된 모습이나,이를 좀더 확대해 나가기 위해 애쓰다 중단된 모습들과는 달리 선율, 다시 말해서 독창자와 합창색채와 커다란 구조를 가지며 흘러가는 것이다.놀랍다.슈베르트의 작업과정을 보면 종교심을 담은 솔로들이 먼저 스케치되고 그것의 단편들과 합창의 단편들이 오케스트라의 재료가 되면서 이음새로 다듬어져 간다. 미사는 곧 노래가있는 교향곡이다. 선율이 있을 때 그에겐 문제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사례이다.
슈베르트의 실내악도 살펴보자. 그의 대표적인 현악 4중주곡제 14번 D장조 '죽음과 소녀'는 누구든 좋아한다.그것이 표현한 대상이나 작가의 미적 목표가 무엇인가 알아서 그런 것은 아닐것이다. 그것이 지니는 가곡의 선율이 주는 이미지가 청자의 심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다른 악장들의 긴장감 도는 대위법적 구조나 당김리듬 등 격렬한 대비는 2악장의 '죽음과 소녀'의 주제와 변주악장의 연장에 있는 장식이다. 이 작품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기억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연주의 빈도가 가장 많은 이 작품의 호소력은 '죽음과 소녀'의 선율이었다.그의 현악5중주, 피아노 5중주 '송어;도 그런 면에서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슈베르트에 비춰지는 다른 작곡가들의 모습
일찍이 자연의 법칙과 모든 현상을 묶어서 탐구하기 시작한 18세기에 들어 루소가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는 "자연이 지니고 있는 색채는 거기에서 출발하는 소리의 여러 층에 그대로 투사된다.그런데 자연의 섭리는 이를 화성의 색채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멜로디에서 표출해낸다"라고 한 일이 있다.그것을 번복하는 후대의 논리가 또 등장을 하나 루소의 이야기에도 진실의 한 측면이 담겨 있다. 오늘날 우리가 슈베르트의 멜로디에 쉽게 접근하고 그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반증이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슈베르트의 음악미는 뭐니뭐니 해도 그의 선율에 있다.그런가하면 동시대의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을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멘델스존을 보자.우리는 그를 멜로디를 통해 아이덴티파이하지 않는다.그는 근본적으로 음재료들의 장인이다.그의 틀림없는 기술이 발휘되는 스케르쪼를 우리는 그의 독특성으로 받아들인다. 한편 슈베르트의 즉흥곡들을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슈만은 어떤가?그는 늘 양면성을 가진 인물로 다가온다.그의 이성은 무엇인가 전통에 입각한 새로운 양식화라고 하는 명제에 파묻혀 있다.이성이 강한 작품에서는 너무 교과서적이라고 할만큼 경직된 틀의 교향곡이나 푸가,소나타들이 파생한다. 그런가하면 그의 감성은 낭만주의의 핵에 걸려있다.낭만주의 시 문학 이이야기하는 방법을 그는 음의 세밀한 안배로 누구보다도 가까이 갈수 있었던 사람이다.차라리 그가 자신의 감성에 함락되었다면 훨씬 좋았으리란 생각마저 하게 된다. 그의 가곡도 그런 점에서 선과 반주가 두개의 동등한 의미를 지니면서 팽팽히 맞서는 모습을보여준다.
한편 브람스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브람스의 관심은 짜임새에 대한 추구로 발전한다.3도를 하나의 세포로 설정한다.그리고 그것을 뒤집어 6도를 다음에 놓아본다.먼저 놓았던 3음을 한번 옥타브 아래로 끌어내려보고 6도의 아랫음을 옥타브 위로 올려놓는다.점점 더 아래로,점점 더 위로 가운데 3도와 6도의 축은 벌어져 큰 악구 하나가 끝나갈 무렵이 되면 그것은 한장의 벽돌이 점점 쌓여 나간 큰 성이 되는 것이 브람스다. 한장의 벽돌로 우리는 브람스를 알아채지 못한다. 다 쌓여진 건축물을 보고그 짜임새에서 브람스를 발견하게 된다. 브람스 음악의 미는 그렇게 쌓여진 구조의 깊이에서 오는 것임을 감지하게 된다. 그런가하면 진보 세력의 리더였던 리스트 같은 경우는 모든것이 형식보다는 내용이 중심이다.자신이 아주 밀도높게 전달하려고 하는 감성을 한꺼번에 이야기한다.그 결과 형식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리스트의 시문학과 같은 장르적 접근은 그의 또다른 낭만적 영웅 예술관과 함께 그에게서 가장 핵이 되는 측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그의 음악에서 그런 특징을 빼면 그의 음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우리에게 미적 경험을 안겨주는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어느 작곡가이건 또한 시대를 극복하면서 한편으로는 시대에 귀속되어 있는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다.보편적으로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들이 지니고 있던 시대의 자연관, 시대의 역사관등등은 이미 의식,무의식적으로 각자의 음악에 스며있는 것을 또한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에 대한 사랑은 아마 그의 멜로디와 더불어 이러한 시대의 폭넓은 호소력이 우리의 경험과 만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Im Frühling, D. 882
노래) Fischer-Dieskau, 반주) Sviatoslav Richter, 1978
그것이 누구의 작품이든, 어떤 대상을 그것 자체로 완벽하게 안다고 하는것은 참으로 어렵다. 정말 그걸 아는 사람이 있을까?하는 질문도,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하게 된다.아무리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본원적 경험이랄지,혹은 절대적 시작이라는 것을 규명하기가 어렵다.처녀성에 걸맞은 예술적경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으로 마주친 작품일 경우 그것에 대한 반응은 자연의 경치나 생활상의 이러저러한 우발사에 우리가 반응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어떤 보편적 특수질서에 결합되기를 요구하는지도 모른다.그런데 그 질서란 찰나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절대 아니고 서서히 스스로 규명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삶과 사물,꿈 등등으로 우리에게 작용하기도 한다. 또 작품 그 자체로 인해 작용하는 힘 사이에서 당기고, 당겨지는 상대적 힘을 바탕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현실적으로 타당하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에 무감각한채 남아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한편 그 과정의 이면을 깨닫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많은 부분 선택적으로 더욱 쏠리는 단편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마련이다.다시 말해서 작품들은 그것들의 진정한 언어를 듣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에게만 그 언어를 들려주는 것이다.그러나 그러한 사람들도 태어나면서부터 곧장 그 언어를 듣고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는데 문제는 남는다.
이런 이야기를 서두로 꺼내는 이유는 동시대, 예를 들어 슈만과 같이 슈베르트가 자신의 의식을 글로,어떤 글이든 많이 남겼다면 작곡가 슈베르트의 미적 관점을 좀더 잘 해부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이다. 글이 있어도 한사람의 미학 또는 미학 이전의 어떤 상태를 통찰하는 것이 어려운데 슈베르트의 경우 작가 자신의 무엇을 나타내기엔 너무도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다. 그래서 그런지 슈베르트에 관한 여러 종류의 언급은 대부분 수용자측 반응들의 관점에서이다. 단순히 관념적이고 심리적인 언급들에 과학적 논증을 부여하기 위해 한 음악 심리학자가 미국의 한 대학에서 실험을 하였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여러곡 한 학년의 대학생들에게 들려주고 통계를 낸 결과, 쇼팽이나 베토벤,바그너등은 다른 작품간의 작품의 반응편차가 큰 반면 슈베르트는 거의다 푸르른 청록색의 색채감을 토로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슈베르트의 삶의 이면을 볼때 과연 어두운 현실을 뛰어넘어 항상 밝고 청명하게 감정을 걸러내는 것이 슈베르트의 목표였겠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물론 피아노 소나타가 아닌 다른 작품을 들려주면서 나타나는 반응 등, 슈베르트 작품의 전체를 여러층의 수용자들에게 전면적으로 행하는 실험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하더라도 의구심은 여전히 남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슈베르트음악을 사랑하는 이유
슈베르트의 입장은 지금 우리가 변호할 수 없을지 모르나 현재 많은 사람들이 슈베르트의 음악을 좋아하는데 대한 어느 정도의 분석은 가능하다고 본다.슈베르트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그의 멜로디가 마치 자신의 심장으로부터 들려오기라도 하는 듯이 들으며,마치 푸른경치처럼 그렇게 바라보는 마음으로 좋아한다. 여기서 슈베르트의 음악은 그것이 행사하는 작용효과와 어우러지며, 여기에 있어서의 작용효과는 작품자체의 것이라기보다는 작품이 '들려주는 것'의 효과라고 본다. 아무튼 슈베르트의 음악미는 모든 것이 선율에서 파생된다. 그의 음악에서 선율이 빠지면 남는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선율은 음악의 어느 요소보다도 우리 사고의 이미지와 직결되어있는 요소다. 슈베르트에게는 선율이 있고 그래서 어느 작가보다도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그의 세계에 빨리 친밀감을 가지게 된다.
예를들어 스케치를 포함해서 남아있는 슈베르트의 교향곡10작품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미완성 교향곡'을 생각해보자. 미완성은 1악장 첫부분의 드라마틱한 서주부분 때문에 기억되지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곧 등장하는 대화체의 멜로디 때문에 미완성을 사랑한다. 스케르쪼의 피아노스케치가 남아있고,오케스트라용 총보도 두 페이지가 남아 있지만 그는 전조에 있어서 매듭을 풀지 못하는 문제점을 안고 거기에서 작업의 펜을 놓게 된다. 필립래드 클리프라고 하는 학자는 '멜로디만으로 작곡가가 왕국에 들어 갈 수 없다'라고 전제하면서 슈베르트를 멜로디를 만드는 작곡가로 치부하는 것은 그가 대곡을 쌓아올릴 힘이 없는 작곡가로 몰아치는 자세와 마찬가지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공격한다.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나 상대적으로 비교를 해볼 때, 역시 그는 멜로디가 먼저 가는 작곡가라는 일면을 무시할 수가 없다.슈베르트의 많은 가곡들이 인간의 내부에 있는 서정적 요소와 연극적 요소를 언제나 서로 상반되는 방향으로 끌어가려고하는 경향도 보이고, 그에 따라 선이 살지 않는 극적 상황만 남는 작품도 있지만 역시 전체의 경향은 선중심으로 흐르고 있다.
예를들어 슈베르트의 가장 연주되지 않는 작품이면서 그의 교향곡을 능가하는 미사들을 살펴보자.교향곡에서 자칫 형식에 충실하기 위해 경직된 모습이나,이를 좀더 확대해 나가기 위해 애쓰다 중단된 모습들과는 달리 선율, 다시 말해서 독창자와 합창색채와 커다란 구조를 가지며 흘러가는 것이다.놀랍다.슈베르트의 작업과정을 보면 종교심을 담은 솔로들이 먼저 스케치되고 그것의 단편들과 합창의 단편들이 오케스트라의 재료가 되면서 이음새로 다듬어져 간다. 미사는 곧 노래가있는 교향곡이다. 선율이 있을 때 그에겐 문제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사례이다.
슈베르트의 실내악도 살펴보자. 그의 대표적인 현악 4중주곡제 14번 D장조 '죽음과 소녀'는 누구든 좋아한다.그것이 표현한 대상이나 작가의 미적 목표가 무엇인가 알아서 그런 것은 아닐것이다. 그것이 지니는 가곡의 선율이 주는 이미지가 청자의 심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다른 악장들의 긴장감 도는 대위법적 구조나 당김리듬 등 격렬한 대비는 2악장의 '죽음과 소녀'의 주제와 변주악장의 연장에 있는 장식이다. 이 작품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기억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연주의 빈도가 가장 많은 이 작품의 호소력은 '죽음과 소녀'의 선율이었다.그의 현악5중주, 피아노 5중주 '송어;도 그런 면에서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슈베르트에 비춰지는 다른 작곡가들의 모습
일찍이 자연의 법칙과 모든 현상을 묶어서 탐구하기 시작한 18세기에 들어 루소가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는 "자연이 지니고 있는 색채는 거기에서 출발하는 소리의 여러 층에 그대로 투사된다.그런데 자연의 섭리는 이를 화성의 색채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멜로디에서 표출해낸다"라고 한 일이 있다.그것을 번복하는 후대의 논리가 또 등장을 하나 루소의 이야기에도 진실의 한 측면이 담겨 있다. 오늘날 우리가 슈베르트의 멜로디에 쉽게 접근하고 그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반증이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슈베르트의 음악미는 뭐니뭐니 해도 그의 선율에 있다.그런가하면 동시대의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을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멘델스존을 보자.우리는 그를 멜로디를 통해 아이덴티파이하지 않는다.그는 근본적으로 음재료들의 장인이다.그의 틀림없는 기술이 발휘되는 스케르쪼를 우리는 그의 독특성으로 받아들인다. 한편 슈베르트의 즉흥곡들을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슈만은 어떤가?그는 늘 양면성을 가진 인물로 다가온다.그의 이성은 무엇인가 전통에 입각한 새로운 양식화라고 하는 명제에 파묻혀 있다.이성이 강한 작품에서는 너무 교과서적이라고 할만큼 경직된 틀의 교향곡이나 푸가,소나타들이 파생한다. 그런가하면 그의 감성은 낭만주의의 핵에 걸려있다.낭만주의 시 문학 이이야기하는 방법을 그는 음의 세밀한 안배로 누구보다도 가까이 갈수 있었던 사람이다.차라리 그가 자신의 감성에 함락되었다면 훨씬 좋았으리란 생각마저 하게 된다. 그의 가곡도 그런 점에서 선과 반주가 두개의 동등한 의미를 지니면서 팽팽히 맞서는 모습을보여준다.
한편 브람스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브람스의 관심은 짜임새에 대한 추구로 발전한다.3도를 하나의 세포로 설정한다.그리고 그것을 뒤집어 6도를 다음에 놓아본다.먼저 놓았던 3음을 한번 옥타브 아래로 끌어내려보고 6도의 아랫음을 옥타브 위로 올려놓는다.점점 더 아래로,점점 더 위로 가운데 3도와 6도의 축은 벌어져 큰 악구 하나가 끝나갈 무렵이 되면 그것은 한장의 벽돌이 점점 쌓여 나간 큰 성이 되는 것이 브람스다. 한장의 벽돌로 우리는 브람스를 알아채지 못한다. 다 쌓여진 건축물을 보고그 짜임새에서 브람스를 발견하게 된다. 브람스 음악의 미는 그렇게 쌓여진 구조의 깊이에서 오는 것임을 감지하게 된다. 그런가하면 진보 세력의 리더였던 리스트 같은 경우는 모든것이 형식보다는 내용이 중심이다.자신이 아주 밀도높게 전달하려고 하는 감성을 한꺼번에 이야기한다.그 결과 형식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리스트의 시문학과 같은 장르적 접근은 그의 또다른 낭만적 영웅 예술관과 함께 그에게서 가장 핵이 되는 측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그의 음악에서 그런 특징을 빼면 그의 음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우리에게 미적 경험을 안겨주는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어느 작곡가이건 또한 시대를 극복하면서 한편으로는 시대에 귀속되어 있는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다.보편적으로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들이 지니고 있던 시대의 자연관, 시대의 역사관등등은 이미 의식,무의식적으로 각자의 음악에 스며있는 것을 또한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에 대한 사랑은 아마 그의 멜로디와 더불어 이러한 시대의 폭넓은 호소력이 우리의 경험과 만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Im Frühling, D. 882
노래) Fischer-Dieskau, 반주) Sviatoslav Richter, 1978




덧글
여담이지만 얼마전에 피델리오를 보러 갔다가 우연히 서곡에 나오는 멜로디가 미완성 교향곡의 일명 '물만 먹고 가지요'와 같더군요. 호호호..
청록의 색체감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듯해요. 글에서도 그렇지만 저 역시 의심이 드네요ㅎ 그의 작품들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 역시 어떤 작품을 좋아하느내에 따라 달라질 것 같기도 하고, 저는 그의 리트를 참 좋아하는데 회화적인 인상과 함께 작품에 따라 정말 다양한 색감이 느껴지거든요.
여튼 참 좋은 글입니다. :)
완벽하거나 뛰어난 사람을 동경할 수는 있겠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예술(혹은 그 범위를 벗어나더라도)은 작가와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의 소통의 방법이므로, 결국 모든것은 사람과 사람간의 문제지요. 슈베르트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고 음악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비유가 조심스럽습니다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 사람들이 아주 많이 모인 것도 같은 이유일거에요. 정치인으로만 보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가 완벽한 인간이어서 많은 존경을 받은것도 아니고, 대통령이라는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던 인물이어서 모인것도 아니고, 다만 그들은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모인것 뿐이니까요. 단순하고 소박한 선율로 평론가들보다는 보통 사람들과 친숙해진 그의 음악과 탈권위한 그의 모습을 겹쳐 떠올리는 것이 비약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덕분에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헤니히님 코멘트를 보고 다시 드보르작의 글이 생각나서 다시 포스팅해 보았습니다. 타이핑 하다 보니 좀 길군요. ^^
더 행복한 것은 아내와 같은 진정한 친구를 찾은 사람이다.
<프란츠 슈베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