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한글 번역 ANNE BOOKS 초판본 by 다음엇지

창조사 ANNE BOOK'S 1964년 2월 초판본 1쇄 1~4권

며칠전에 모드여사 1907~1908년 일기를 읽고 정리하면서 갑자기 또 신지식 선생의 국내 첫 번역본에 대한 생각이 났습니다. 사실 신지식 선생 번역본을 좋아하면서도 전질을 구하기 쉽지도 않았고 해서 헌책방에 가끔 올라와 있는 80년대 재간본등을 검색해 보곤 했는데 늘 구매 직전에 포기하곤 했었지요. 그런데 이날은 왠일인지 가끔 가던 고서적을 취급하던 부산의 서점의 도서 목록을 검색하자 마자 턱하니 창조사본! ANNE BOOK'S가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눈을 잠깐 의심했습니다. 사진을 올려 놓은 것을 보니 초판본이 분명했습니다. 상태는 1권 표지가 뜯어져서 분실되어 있었고, 5권 전질 중에서 5번째 권이 빠져있어서 좋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을 따질 개재가 아니었죠. 창조사의 ANNE BOOK'S는 요즘의 전질과는 달리 <애번리 이야기>가 4번째 권이고, <무지개 골짜기>와 <잉글사이드의 릴러>가 5번째 권입니다. 그리고 오늘 책이 도착했습니다. (초판본을 찾아 헤맨지 15년 째입니다. 책이 있기는 한데 찾을 수 없다는 연락을 받고 직접 찾아가서 억지로 인연을 만들었다는 뒷이야기... 징하다 다음엇지)

그리고 책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다지 기대를 하지도 않았는데 창조사에서 출간된 '앤 시리즈' 초판 1쇄본이었습니다!!! 1964년 2월 10일 초판인쇄되었고 같은 해 2월 15일 발행된 것입니다. 권당 120원이로군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보관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닙니다. 특히 2번째권은 표지가 검은 곰팡이로 덮여 있고 1, 3, 4권에 비해서 내지의 상태도 좋지 않습니다. 일단 갖고 있던 중성지로 감싸 두기는 했습니다만 도서관에 있는 친구에게 조언을 좀 구해야겠습니다. 소장하고 있는 100년이 넘은 <Anne of Green Gables>와 <Anne of Avonlea> 초판본들의 상태가 예상 밖으로 무척 좋은 것에 비하면 많이 안타깝습니다.
사실 몇달 전에 국립 중앙 도서관에서 초판들을 대여해서 면밀히 살펴보고 복사해 왔었습니다. 서지학적으로 정리하고 싶어서였는데요. 첫번째권은 상태가 좋지 않아서 '대여불가' 판정을 받고 결국 면밀히 살펴 본 것은 두번째 권이였죠. 도서관에서 보관하는 초판본의 경우에도 겉표지는 없었고, 도서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두꺼운 표지로 둘러싸여 보호되어 있었습니다. 내지의 상태는 끝부분이 찢어져 있는 부분도 있었지만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원본에서 번역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첫번째 권의 머리말을 보니 무라오카 하나코의 일본 초판본을 중역한 것이었습니다. 잠시 죽 읽어 봤는데 40여년전에 나온 책이지만 번역이 참 좋습니다. 무라오카 하나코의 번역 자체가 훌륭했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되구요. 마츠모토 선생님이 번역 의뢰를 받고 원본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일본에서 어린 시절 접했던 책이 훌륭했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그 당시의 번역들은 주로 문단에 등단하신 저명한 작가들에 의해 나왔기 때문에 우리말 어휘의 사용이나 매끄러운 문장이 돋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이전의 <버드나무 숲에 부는 바람>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지만 지금의 번역에서 제가 무척 섭섭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손질을 하고 책의 상태가 호전되는 대로 서지학적으로 초판본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보관 상태가 정말 안 좋지만, 고생 고생하면서 찾아 낸 정말 저에게는 소중한 책입니다. 아래는 1권의 첫부분에 실려 있는 신지식 선생님의 서문입니다. 띄어쓰기나 맞춤법은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옮겼습니다.

작가와 작품을 말한다.
  <빨강머리 앤>의 저자는 카나다 출신의 루시 모우드 몽고메리(Lucy Maud Montgomery)라고 하는 여류 작가입니다.
  이 작품은 아직도 이름 없었던 한 여성, 루시여사가 서른 살인 一九○四년에 썼다고 합니다.
  루시 여사는 혹시 책으로 출판할 수 있지나 않을까 하여, 이 원고뭉치를 들고 세 군데나 출판사를 두루 찾아가 봤지만, 모두 거절당하고 말았읍니다.
  하는 수 없이 출판하는 것을 단념해 버리고, 트렁크 속 깊이 넣고 자물쇠를 잠가 버렸읍니다. 그러구러 三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 그러니까 一九○七년 가을의 어느 날이었읍니다.
  루시여사는 무심코 자기의 그 옛 원고뭉치를 다시 꺼내어 읽게 되었읍니다.
  자기가 쓴 작품이었지만, 읽기 시작하자 너무나 재미있어 해가 저무는 줄도 모르고 마냥 앉아서 읽다 보니, 어느덧 등불이 켜지는 저녁때가 되어 있었읍니다.
  여기서 다시 루시여사는 <앤>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보스톤에 있는 폐지출판사로 이 원고뭉치를 보냈읍니다.
  뜻밖에도 폐지출판사에서는 이 원고를 五백 달라로 사 주었읍니다. 이렇게 하여 <빨강머리 앤>은 세상에 나오게 되었읍니다. 루시여사는 이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하였읍니다.
  그 당시 루시여사는 인구가 二백뿐이고, 철도에서는 十一마일이나 떠러져 있는 캬봔딧시라고 하는 반농반어를 하면서 살고 있는, 아주 작은 촌락의 三등 우편국에서 사무를 보고 있는 삽십 대의 미혼여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무렵의 루시여사에게 있어, 五백 달라라는 돈은 아주 큰 돈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앤>은 출판이 되자 마자, 百만 부 이상이나 팔렸고, 무성이지만 영화화까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 현명하게 계약을 해 두었더라면 막대한 돈을 벌었을 것이라고, 루시여사는 후회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떻든 이 작품으로 인해서 루시여사의 이름은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되었읍니다.
  루시여사는 어렸을 떄 어머니를 여의었으므로, 아버지는 어린 딸을 외가의 조부모에게 맡기고, 혼자 장사를 하러 다른 고장으로 떠나가 버렸읍니다.
  그리하여 루시여사는 외조부모 밑에서 죽 자랐으며, 여사가 스물 네 살 되던 해에 조부가 돌아가셨읍니다. 그래서 여사는 전부터 일해 오던 우편국에서 계속 근무하면서, 할머니를 도우며 살았읍니다.
  루시여사는 이 할머니를 무척 사랑하였기 때문에, 一九一一년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읍니다. 사실 루시여사에게는 매그날드라고 하는 목사와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이였고, 약혼까지 하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할머니를 위해 十년 간이나 결혼을 연기해 왔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인 一九一一년에야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 때 루시여사는 三十七세였고, 신랑인 매그날드는 四十一세였다고 합니다.
  루시여사는 一九四二년 六十八세로 남편보다 一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루시여사가 쓴 <앤>의 이야기는 <Anne Book's>라고 해서 모두 十부로 되어 있읍니다. 이 첫째권에는 <빨강머리 앤>(Anne of Green Gables)과 <앤의 청춘>(Anne of Avonlea) 두 편을 실었읍니다. <앤>의 이야기는 이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소녀 <앤>이 할머니가 될 때까지 계속되어, 책으로는 모두 다섯 권으로 나오게 됩니다.
  몇 년 전, 우연한 기회에 이 책을 읽게 된 역자는, 이 재미있는 <앤>의 성격에 이끌려, 깊은 감명을 받았읍니다. 그 때 받은 인상은 오래 사라지지 않아, 언젠가는 이 이야기를 우리 나라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랆을 늘 가지고 있었읍니다.
  그러던 차, 이번에 창조사에서 이러한 기회를 베풀어 주신 것에 깊은 감사의 뜻을 금할 수 없읍니다.

  그리고 이 책은 일본의 여류작가 무라오까하나코(村岡花子)여사의 일역판을 중역하였음을 밝혀 둡니다. <앤>과 같은 불쌍한 고아들이 많은 우리 나라에서, 저는 이 책이 조금이라도 그러한 소년소녀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보람있을까 생각하면서, 나의 사랑스러운 친구 <앤>을 소개합니다.

1963년 이른 봄 신지식 씀


그리고, 일러스트가 독창적인 편인데 바로 60~70년대 삽화가로 최고의 명성을 날렸던 우경희(禹慶熙) 화백의 그림입니다. 특히 일간지 소설의 삽화로 유명했고 삽화만으로도 많은 팬을 거느렸는데,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 홍성유의 <비극은 있다>, 선우휘의 <물결은 메콩강까지>, 한수산의 <밤의 찬가> 등의 삽화가 그의 작품이었습니다. 을유 문화사의 <아동문학독본>과 어린 시절에 닳도록 보았던 계몽사의 <한국위인전> 그리고 동서문화사의 <딱다구리 100선>의 삽화를 그렸습니다. 83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신 후에 한인미술협회 고문을 맡아 활동하시다가 2000년 5월에 타계하셨습니다.
1권 안쪽 표지
헌책 답게 낙서가 있다. 그런데 죠지 Clift 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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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09/01/24 01:1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다음엇지 2009/01/24 12:52 #

    앗.. 어서오세요. 제가 팬인 것 알고 계신가요.. 하하..
    이 책을 갖게 된 것은 정말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잘 관리해서 보관하려고 합니다.
    다시금 느끼는 것이지만, 예전 책들의 문장과 글들을 읽으면서 정말 우리다운 말과 글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마음 넉넉한 한 해 되세요~
  • 로맨티스트 2009/01/24 10:35 # 삭제 답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그나마 책이 남아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두번째 1964년 초판의 실물을 가지고 있게 되셨군요. 축하합니다!
    크리프트는 소장자의 영어 이름인 것 같습니다.
    영화배우 이름을 쓴 것일 수도 있겠지만 1950~70년대에 영문학 하던 분들은 모두 책 앞에 자기의 영어 이름을 적곤 했죠.
  • 다음엇지 2009/01/24 12:53 #

    설마 제가 두번째이겠어요. 아마 많은 분들이 집안 서재안 어딘가에 꽂혀 있곘죠. 어떻게 잘 손질해서 보관해 둘 것인가가 관건인 것 같습니다. 다시 봐도 신지식 선생님의 유려한 문장이 정말 좋더군요.
  • 아리수 2009/01/24 22:10 # 삭제 답글

    호~ 초판본...
    다음에 놀러가면 볼 수 있으려나요? ^^;
    앤에 대한 언니의 열정은 정말 대단!!!

    그나저나...
    언니~ 저 브라우니 레시피 좀 주세요~.
    언니네 집에서 먹은 그 브라우니가 먹고파요~~~ ㅠㅠ
    (오늘 만들었는데.. 그 브라우니가 아니어서 슬픔. 흑~)
  • 다음엇지 2009/01/27 13:39 #

    흠... 특별한 레시피는 없는디...
  • 그림자놀이 2009/01/25 12:03 # 답글

    앤 책도 흥미롭지만, 신지식 선생님의 책을 너무나 재밌게 읽던 학창시절이 생각나서 잠시 멈칫하다 갑니다.
  • 다음엇지 2009/01/27 13:49 #

    오.. 놀랍네요. 저도 [바람의 금잔화] 라던가 [열두달 이야기] 같은 것들을 어릴 때 보았었죠. 신지식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앤을 번역하셨다는 것은 저도 몇년 전에야 알았었죠.
  • 그림자놀이 2009/01/28 11:45 #

    저는 신지식 선생님 책만 나오면 거의 다 읽었던 것 같아요. 이야기가 따뜻하고 문장이 아름다웠다는 기억이 남아있네요.
    젤 첨에 본게 뭐더라 뭐더라 며칠을 생각하다 겨우 생각났다는 거 아닙니까!!!

    '감이 익을 무렵'이란 책이었어요. 진한 주황색 표지의 얇은 책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무튼 그때는 그 책이랑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랑 두 책에 폭 빠졌던 기억이 납니다. ^^

    어디 다시 구해서 읽었으면 좋겠어요. 문장이 너무 예뻤다는 기억만이 남아있네요.
  • 다음엇지 2009/01/28 13:01 #

    아... 주황색 표지의 '감이 익을 무렵' 이라면 60년대 책인 것 같네요. 저는 70년대 책으로 본 것 같구요. 하근찬의 [여제자]가 같이 떠오르지만 역시 신지식 선생님 쪽이 더 이쁘고 여운도 많이 남습니다.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헌책은 몇 권 검색되지만 모두 절판된 책이로군요.
    요즘 정서와는 맞지 않아서일까요? 아니 맞지 않을 이유도 없지요.
    시간 날 때 헌책방에 들려서 꼭 쟁여두어야 하는 책 목록에 올려두었습니다.
    좋은 책들이 생각날 때마다 어렵게 헌책방을 뒤져야 한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 로맨티스트 2009/01/29 12:18 # 삭제

    한국 아동문학사 관련 책들에서 신지식 여사님 프로필을 찾아 2년 동안 조사해서 글을 적고 나니, 곰돌이 주차장(대교출판) 뒤에 다 나오더라는... ㅠㅠ 여사님께서 직접 쓰셨더라는 ㅠㅠ;; 역시 유아용 책이라는 무시하지 말고 모두 읽어야 됩니다./
    창조사 빨강머리 앤 시리즈 최초 판본 및 발행은 1963년입니다. 10권이었다는데 이 외의 자료는 현재 없습니다./
    창조사 대표이신 최덕교 회장님은 1963년 창조사를 설립했고 앤 시리즈는 최초 발행된 돈 되는 중요 출판물 중의 하나였습니다. 창조사는 많은 번역서와 교재, 창작 소설, 아동서적을 출판했고 회장님은 '한국잡지백년'이라는 걸출한 작품을 남기시고 지난 여름 별세하셨습니다. 창조사 사옥은 유언에 따라 장학재단에 기부되었고 출판과 관련 있는 자녀는 동덕여대의 영문학 교수이신 최서래님과 이대통역대학원의 번역가 최애리님입니다. 최서래 교수는 아시모프 파운데이션 시리즈를 번역했고 최애리 님은 불문학 출신으로 중세 전문입니다.
  • 다음엇지 2009/01/29 13:05 #

    로맨티스트님/ 넵.. 제가 조사한 바로는 [빨강머리 앤]은 1963년이 초판이 맞구요. 아마도 다른 시리즈 중의 한 권으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5권 짜리 시리즈로 나온 것은 64년이 맞는 것 같습니다. 모두 생존해 계시고 기록도 있을 터이니 결국은 관계자에게 확인을 해야 하겠지만요. ^^

    그리고, 최서래 교수 아버님이 창조사 창립자셨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 로맨티스트 2009/01/29 22:10 # 삭제

    앗, 죄송. 집에 와서 책을 보니 곰돌이주차장이 아니라 하얀길(대교출판) 뒤에 신지식 여사님의 프로필이 있네요. 대교의 같은 시리즈라서 착각했나 봅니다.
  • 2010/03/17 10:03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저도 오래된 빨강머리 앤을 갖고 있는데 요거 자료 조사하다 님의 블로그를 보게되었읍니다.님의 글을 읽다보니 제가 갖고 있는 책도 님과 같이 창조사에서 나온 초판본 앤임을 알게 되었읍니다.저도 님처럼 앤씨리즈 4권을 갖고 있는데 상태는 훨 좋군요.제거는 박스도 있지만 아쉽게도 제 1권이 없군요.ㅎㅎ 이거 남은 1권을 언제 구할수 있는지 궁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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