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적 사고와 믿음의 관계 by 다음엇지

ExtraD 님의 거대가속기와 지구의 안정성 논란 글과 함께 합니다.

늘 궁금하던 것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재미와 호기심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충분히 교육을 받은 후에도 비논리적이고 허황된 것들에 경도되는 이유를 말이죠. 종교의 광신은 차치하더라도 수많은 사이비 과학이나 점성술 그리고 잘못된 근거에 의한 황당한 주장등에 열광하는 지식인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과학뿐이나라 인문학쪽에라면 대표적으로 "환빠"로 불리는 이들이 있죠.

그건 어떤 '믿음'의 문제로 환원될 수도 있을 겁니다. '믿음' 이라는 것은 사실 우리 생존의 문제입니다. 뇌의 동작 구조상 '믿음'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인 것이죠.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존과 직접 연관되는 것이기도 하구요.

믿음은 보통 4가지 요소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사고방식(perceptions), 감정(emotions), 인지작용(cognitions) 그리고 사회적인 상호작용들 일텐데요. 이것들은 또한 자기들끼리도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요소들이 모두 뇌의 기능 동작들 안에서 교차되면서 우리가 '믿는다' 라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의 믿음들은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 개발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방법으로든 믿음을 갖도록 '이미' 설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들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살아가는 동안 경험하는 것들에 의해서 각자 다른 모양을 갖게 됩니다.

문제는 그 '믿음' 이라는 것이 우리의 생존에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일단 형성된 그 '믿음'에 매우 강하게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죠. 비록 그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명백한 증거들이 나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브레인은 우리가 새로운 아이디어에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존중하며, 그 믿음을 바꿀 수 있는 능력 또한 갖고 있습니다. '믿음' 을 갖을 수 밖에 없는 것은 구조적인 문제일 수 있지만, 잘못되고 허황된 사실은 충분히 판단하고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육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고민을 계속 하던 중 최근에 어떤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수학" 입니다. 그 근본적인 배경에는 사람들의 수학에 대한 거리감과 그로부터 오는 현저히 저하된 수학적 능력이 있었던 것이죠. 간단히 말하면 숫자에 약하면 논리에도 약하다 라는 중간 결론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학적 능력은 미적분이나 고등수학을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이 아닙니다. 얼마 안되는 수적인 사실로부터도 필요할 때 정보를 모을 수 있고 기초적인 숫자들을 근거로해도 잘못된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그런 기본적인 능력인 것이죠. 사람들이 단순한 계산과 예측을 좀 더 잘할 수 있다면 아주 명백한 여러가지 추론이 가능할 것이고 한심한 생각을 하는 일도 줄어들 것입니다.

시 좋아하고 별 좋아하던 어린 시절에 좋아하던 외국 시가 있습니다.

I Heard The Learn'd Astronomer
Walt Whitman

When I heard the learn'd astronomer;
When the proofs, the figures, were ranged in columns before me;
When I was shown the charts and the diagrams, to add, divide, and
measure them;
When I, sitting, heard the astronomer, where he lectured with much
applause in the lecture-room,
How soon, unaccountable, I became tired and sick;
Till rising and gliding out, I wander'd off by myself,
In the mystical moist night-air, and from time to time,

내가 그 박식한 천문학자의 말을 들었을 때;
증거와 숫자들이 내 앞에 줄지어 나열되었을 때;
더하고, 나누고 계량할 도표와 도형들이 내 앞에 제시되었을 때;
그 천문학자가 강당에서 큰 박수를 받으며 강의하는 것을 앉아서 들었을 때
나는 알 수 없게도 금방 따분하고 지루해져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빠져 나온 뒤 나 홀로 거닐면서
촉촉히 젖은 신비로운 밤 공기 속에서 이따금
말없이 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문호 휘트만의 '내가 그 박식한 천문학자의 말을 들었을 때' 라는 시입니다. 언뜻보기에는 고리타분하고 멋도 모르는 천문학자보다는 감성과 멋을 아는 듯이 보이는 휘트만쪽이 멋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일면에는 휘트만이 받았을 부실한 수학교육과 그에 의한 심리적인 저항감, 수학의 본질에 대한 지극히 낭만적인 오해가 보입니다. 이는 휘트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휘트만과 같은 유형일 것입니다. 세익스피어와 괴테, 위고 등은 알아도 동급이라 할 수 있는 가우스, 오일러 등은 들어 본 적도 없다고 말할 겁니다.

양자역학이 지배하는 미시세계 뿐 아니라 우리가 인지하고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는 이 거시세계 역시 거대한 확률의 세상입니다. 확률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우리 삶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19세기 물리학의 중요한 업적 중의 하나는 바로 통계와 확률에 대한 업적이 아닐까 합니다. 이 세상 대부분의 현상들은 대개는 확률적인 시뮬레이션으로 설명될 수 있다. 교육이라는 것이 이 세상 현상들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성숙된 자세와 균형감을 갖게 하는 것이라면 어떤 분야이든지 광신자나 근본주의자 그리고 사이비 과학의 추종자들은 수학 교육의 실패자들입니다.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추론으로 간단히 알 수 있는 의미없는 우연의 일치나 현상들이 가득차 있는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을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 입니다. 이때문에 수학이 필요합니다. 이미 확률은 일부 수학자들만의 세계가 아닙니다. 신문지상이나 뉴스에서 수없이 듣고 지나치는 통계 수치들이 그렇습니다. 이미 우리 삶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죠. 그렇게 수학과 과학에 의존해서 사는 첨단 세상에서 그토록 수학과 과학에 관심이 없고 무지하기까지 한 것이 일면 놀랍기도 합니다. 대충의 윤곽을 살펴 판단을 할 수 있는 어림셈에 대한 훈련이 안되어 있는 것 뿐아니라 합리적 추정 방법 역시 배우지 못한 것 같습니다. 수학은 일을 편하게 해주는 유용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사고방식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사고방식의 아주 대표적인 예가 어떤 문제든 "개인화" 해서 본다는 것입니다. 사건을 지나치게 개인화하면서 객관적 관점을 거부합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다 시피 객관적인 시각은 수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수학을 멀리하게 되면 스스로 오류의 함정을 파게 됩니다.

올해를 뜨겁게 달군 '안전'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봅시다. 예를 들어 어떤 새로운 위험성에 사람들이 노출되었다고 합시다. 그 확률은 무척 작습니다. 물론 이 확률은 1년간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교통사고나 우발적인 사고에 의한 위험보다도 낮죠. 그러면 이것이 안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판단합니까?

숫자에 약한 사람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 다 좋아. 수학적으로는 안전하다고 하자구, 그런데 네가 당하면 어떻게 하지? "

의기양양하게 핵심을 찔리니까 어떠냐 하는 우쭐한 표정을 하고 앞에 서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위험성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확률' 적인 현상입니다. 결국은 어떤 '확률'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죠. 물론 수학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표현하자면 '무한' 하겠지만 이상일 뿐이고 실제로 '유한'한 것이 생명이라면, 실재로 생명의 값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 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문제 해결의 올바른 접근 방법이 되겠죠. '확률' 적인 현상을 본질적으로 보지 않고 고 단편적으로 다룰 때 해결은 요원해 집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전형적인 예가 주로 언론에서 보이는 오류이기도 한데 온갖 우연의 결과물들인 것들에 연관성을 맺은 다음에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 의미에 반하는 결정적인 통계자료는 과소평가합니다.

확률적으로 볼 때 세상에 있는 우연의 일치라는 것은 상당히 자주 일어나는 일상적인 현상입니다. 하지만 순전히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임에도 중요한 의미를 부연합니다. 이렇게 일반적인 온갖 것들의 이해를 위해서 의미를 부여해서 연관짓는 것은 인간의 지식이 현저하게 부족했던 시기 어떻게 던지 설명해 보려던 인간들의 심리적 유물로 심리적인 착시일 뿐입니다.

이런 종류의 우연의 오류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평균의 회귀에 대한 오해' 이겠지요. 평균으로의 회귀라는 것은 무작위적인 수량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지 무슨 절대적인 과학 법칙이 아닙니다. 하지만 상당히 광범위한 곳에서 평균의 회귀가 판단의 근거가 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심리학자 아모스 트버스키와 대니얼 카니먼의 연구를 봅시다. 그들은 비행기 조종사가 안전하고 훌륭하게 착륙을 하면 칭찬을 받고 실수를 하거나 잘 못하게 되면 질책을 받는 상황의 실험을 했습니다. 교관들에 의해서 모인 데이터는 다음과 같았죠.

1. 칭찬을 하게 되면 비행기 착륙 실적이 악화된다.
2. 질책을 하게 되면 비행기 착륙 실적이 향상된다.

이를 바탕으로 트버스키와 카니먼은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결론 : 처벌을 하면 행동이 향상되고, 보상을 하면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을 징벌함으로써 자신이 보상받고, 다른 사람을 보상하면 그 처벌을 자신이 받게 되는 것이 인간이다.

이 결론대로라면 효율적인 인간 세상은 참으로 각박하겠습니다. 여기서 이 두 심리학자가 간과한 것이 평균으로의 회귀 현상입니다. 비행사가 아주 훌륭하게 착륙을 했다면 그것은 착륙이라는 여러 시도 중에서 극단값에 가까울 확률이 높습니다. 즉 이후에는 보통 수준의 착륙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죠. 마찬가지로 아주 힘겹게 착륙을 했거나 실수를 했다면 그 이후는 그보다는 더 잘 착륙할 확률이 더 높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조건이 아니라 확률을 모르는 그들의 '사실'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져온 무지의 소치일 뿐입니다.

그리고 몇달전 이글루스에서 첨예한 대립을 했던 정신분석 관련 논의도 떠오릅니다. 그런 지리하고 결론이 안나는 논쟁이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보통 인문학에서 이루어지는 '진술' 들은 '반증 가능' 하지 않고 따라서 과학의 영역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심정적인 위안을 주는 훌륭한 말일지라도 틀렸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을 때 문제가 생깁니다. 틀렸다고 입증할 수 없는 문장은 언제나 수세에 몰렸을 때 빠져나갈 논리를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20세기의 위대한 언어 철학자 콰인(W.V.O. Quine)은 경험적 지식으로는 어떤 특정한 신념을 기각할 수 없다는 결론까지 내리게 됩니다. 그는 과학을 상호 연관된 가설과 절차, 공식화가 통합된 그물망으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신념을 이루는 그물망은 유기적이기 때문에 신념의 유지를 위해 그물망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거나 바꿔치기가 되거나 하는 것을 불사할 수 있다면 어떤 허황된 믿음도 고수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인식론의 탈철학화, 경험론 비판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논리학 뿐만아니라 과학적 사고와 방법의 기초가 되는 수학 과 확률 통계학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이 방법을 통해서 진짜와 가짜를 가리는 것이 가능합니다.

결국 길게 떠들었지만 이는 교육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이미 이렇게 되어 버린 우리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성숙함과 균형감을 갖게 해 줄 수 있을까요. 사회에 만연해 있는 수학에 대한 불안감과 거리감을 없애는 것은 제대로된 수학 교육에서 시작될 수 밖에 없겠지요. 수학은 절대로 현실과 동떨어진 비밀스러운 학문이 아니라 현실 법칙 자체가 숫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확률적인 삶의 본질을 깨닫고 수에 대한 감각 특히 비례에 대한 감을 갖는 것은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이런 기반 위에서 허황된 주장이나 거짓된 삶과 진짜 현실 사이의 차이에 대한 올바른 비교 판단이 이루어 질터이고 이것이 바로 까뮈가 말하던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기본요건인 부조리의 인식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한줌밖에 안되는 변변찮은 존재인 인간이 벌레나 생쥐보다 고귀하고 위대할 수 있는 무엇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런 생각의 실마리를 제공했던 몇 권의 책을 권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숫자에 약한 사람들을 위한 우아한 생존 매뉴얼 - 존 앨런 파울로스, 김종수 옮김, 동아시아
2) 직관수학 - 수학 영재들의 수학 사고법, 히타무라 요타로 , 조윤동 옮김, 서울문화사
3) 비즈니스맨이 꼭 알아야 할 확률의 법칙 - 히오류키 코지마, 이정환 옮김, 토네이도
3)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 - 리처드 파인만, 김희봉 옮김, 사이언스 북스
4) Radical Equations: Civil Rights from Mississippi to the Algebra Project - Robert P. Moses, Charles E. Co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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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traD 2008/08/30 07:51 # 답글

    자연스레 점집을 찾는 젊은이들을 보면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어보이면서, 한편으론 과학교육의 실패의 현장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다음엇지님께선 그것을 수학 (혹은 숫자)에 대한 알레르기와도 연결지어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저도 기본적으로 같은 생각입니다.

    돌아가신 민호기 선생님께서 해방직후 한국의 모습을 가리켜 "미적분학도 모르는 미개한 나라"라고 통렬하게 말씀하셨다는데 21세기 한국의 모습은 얼마나 달라졌는지 반성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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