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드 여사와 1차 세계 대전 by 다음엇지

몇번이고 장소를 옮긴 우석훈 박사의 블로그를 가끔씩 들어가서 재미있게 보고 있다. 전문적으로 논의를 할만큼의 유럽 생태 경제 이론들에 대해 아는 게 없고 절대로 친절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블로그는 아니지만, 우박사님의 글은 별로 인식하고 있지 못했던 여러가지 지점에서 정치나 사회 현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주시기 때문에 흥미롭게 보고 있다. 이번에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 의 절판과 개정판 소식을 전하시면서 <빨강머리 앤>을 염두에 두고 쓰셨다는 이야기를 하셔서 깜짝 놀랐다.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 전면 개정판을 준비하면서... by retired

"<빨간 머리 앤>이 한국에서 절판되었다는 것을 알고, 충격에 빠졌다. 아직 남아있는 10권, 전권을 주문했다. 세상에 <빨간 머리 앤>이 절판되는 나라가 다 있나? 보다보다 처음 봤는데, 한국이 그런 나라이다. 이런 나라에서 2천권을 목표로 목숨걸어야 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하다."

물론 빨강머리 앤 '전집'에 대한 이야기이다. 올해 출간 100주년이 되는 시리즈의 1권 <빨강머리 앤> 과 2권 <젊은 날의 앤>의 경우는 끊임없이 재출간되고 있다. 나의 경우에도 완역은 아니더라도 신지식 선생님의 낭만적이고 시적인 창조사 번역을 좋아하지만 절판된지 오래되어서 헌책방에서 구하기도 힘들다. 최초 완역이기도 하고 출판사에도 꽤 많은 매출적 이익을 안겨준 것으로 아는데 김유경씨의 동서문화사 앤 시리즈가 이번에 절판이 되었나 보다. 안타까운 일이다.

우박사님은 그리고 아래의 세가지 측면에서 앤 시리즈를 언급하고 있는데 흥미롭다.

1) 이 <빨간 머리 앤>은, <디워 사태>와 관련되어 있는데, 디워 사태에 나왔던 아주 이상한 얘기들에 대한 대반격이 <빨간 머리 앤>에 포함되어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이 쇼비니즘이 조금 잦아들면, <빨간 머리 앤을 읽는 법>에 관한 책을 써보고 싶기는 하다.

2) 세상을 바꾼 소설 중에서, 여성들에 관한 삶을 바꾼 소설 두 개를 꼽으라면, <오만과 편견> 그리고 그보다 훨씬 위대한 변화를 만든 <빨간 머리 앤>을 고를 수 있을 것이다.

3) 좀 미안한 말이기는 하다... 한국의 철학자와 비평가들은 아직 <빨간 머리 앤>을 분석할 수준은 안 된 것 같고, <반지의 제왕>과 <빨간 머리 앤>을 연결시킬 준비가 덜 되어있는 것 같다. 두 개 다 1차 세계대전의 충격 속에서 등장한 대형 작품들이다.


첫번째 디워 사태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그리 크게 고민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한 연결점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걸 위해서는 중요한 물음이 무엇이고 어떤 지점에서 중요 논점이 오고갔는지에 대한 파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여성의 삶의 변화에 끼친 영향은 구미 사회 뿐 아니라 일본과 우리나라까지도 여러가지 지점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갈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모드 여사 본인이 원했던 사회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대해서 본인의 글 속 주인공들을 통해 Role Model을 제시하고 있다. 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빨강머리 앤> 1권만을 살펴 보더라도 린드 부인이나 마을 아주머니들에 의해 표현되는 당시에 만연했던 여성에 대한 상식들과 마릴라와 앤이라는 혈연으로 이어져있지 않은 모녀들에게서 표현되는 새로운 여성상과 철학의 대비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그 세계관을 통해 새로운 모습을 완성해 가는 앤을 통해서 많은 여성들이 받았을 영향은 그냥 지나칠 수준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의외로 여성의 정치적인 견해나 입장 또한 많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런 관점에서 앤 시리즈에 나오는 주요 여성들에 대해서 정리를 해 봐야겠다. 동서 문화사에서 <달이 가고 해가 가고>로 번역된 <애이본리 연대기>에 나오는 간호사 낸시 로저슨이라던가 가정을 갖지 않고 끝까지 커리어 우먼의 멋진 모습(?)을 보이는 동서문화사에서 <약속>으로 번역된 <윈디 포플라의 앤>에 나오는 캐서린 브룩등 흥미로운 신여성들이 앤 시리즈에는 많이 등장한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 반란을 꿈꾸다 - The Blue Castle by 다음엇지

세번째 <반지의 제왕(Lord of the Rings)> 시리즈와의 연결 부분은 눈이 번쩍 뜨인다. 나 역시 <반지의 제왕>을 좋아하고 몇번씩 완독을 했었었고 이미 반지의 제왕과 세계 대전의 연결 고리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 왔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지금까지 내가 짝지워 봤던 책들은 주로 이야기를 쓰거나 철학적인 배경이 되었을 만한 책들이었다.

이미 불멸의 앨리스에 대한 이야기는 정리했었고, 아이라는 존재는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존재라고 생각하던 낭만주의 작가들 특히 디킨즈의 영향에 대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Anne 과 Alice의 기묘한 관계 - Looking Glass를 통해 보는 작가의 생각 by 다음엇지
Anne 과 Alice의 기묘한 관계 - 재미있는 아동문학 으로서 by 다음엇지
Anne 과 Alice의 기묘한 관계 - 두 작품이 비교되는 연유는 by 다음엇지

그 외에도 이야기 속에 <눈의 여왕>이 언급되는 만큼, 안데르센의 이야기들이라던가 어린 시절부터 그녀의 자유 주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는 키플링의 <고양이는 왜 혼자 다닐까?(he Cat Who Walked by Himself)>도 마음의 친구 사촌 프레데리카 캠벨과 연관지어서 떠올릴 수 있다.

마음의 친구 사촌 프레데리카 캠벨 by 다음엇지

그리고 당시 평론가들로부터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이야기되었고 실제로도 애독하고 있던 Alcott의 <작은 아씨들> 이라던가 모드 여사 자신이 마치 자신의 쌍동이 영혼이 작가 안에 있지 않을까 하고 가슴 벅차하던 Elizabeth von Arnim의 <엘리자베쓰와 독일 정원>, 사춘기 시절 즐겨 읽었다던 미국의 <<집시(Gypsy)> 스토리, 피터팬을 작가 J.M. Barrie 의 작품들 역시 그녀의 뿌리인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로 그 속에서 자신과의 공통점을 찾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푸케의 <운디네(Undine)> 일 것인데 한때 그녀가 빠져 있던 책으로 앤이 상상하는 나무와 호수와 샘의 요정들의 원천이 바로 이 책에 있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 <호빗>에서 시작하기는 했지만 <반지의 제왕>은 전쟁의 참상 한가운데 있었던 돌킨의 고뇌의 발로로도 볼 수 있다. 돌킨은 1차 대전 당시 가장 치열했던 솜즈 전투에 참전했던 통신 장교였다. 그러다 보니 전선 전역의 참담한 상황을 누구보다도 먼저 접했다. 군인들은 적들의 총탄보다는 굶주림과 전염병 그리고 신무기인 화학병기들에 무참하게 죽어갔다. 그로 인해 살아 돌아와서도 그가 받았을 정신적인 고통과 악몽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더구나 대학때 절친했던 친구들은 모두 죽었다. 모르도르에서 돌아온 영웅 프로도는 더 이상 과거의 샤이아의 유쾌한 프로도가 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중간계라는 판타지 세계는 그냥 단순한 현실도피가 아니었다. 그곳은 은유를 통해 현실을 나타내고 판타지를 통해 삶이란 죽음이란 무엇인지 윤리와 철학적인 사유가 녹아져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돌킨은 삶과 죽음을 이야기한다. 세계 대전과 같은 절망과 고통은 그곳에도 있다 하지만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그 절망과 고통에 용감히 맞서는 생명들의 믿음과 희망이 있다. 다시 평화는 찾아온다. 하지만 그 평화는 전쟁 전의 평화는 아니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 역시 1차 대전에 대해 무척 고뇌하던 지식인이었다. 당시 장로파 교회 목사의 아내로서 캐나다 온타리오의 리스크데일 목사관에서 살고 있던 그녀에게 마을과 교구민의 평화와 안정을 돕는 것은 의무이기도 했다. 자신의 교구의 21명의 젊은이들이 전쟁에 참전했고 그 중 6명이 전사했다. 그녀는 1919년에 출간된 7번째 책인 <무지개 골짜기(Rainbow Valley)>를 아이때부터 보아왔던 전사한 세명의 젊은 군인에게 헌정하고 있다.

To the memory of Goldwin Lapp, Robert Brookes and Morley Shier who made the supreme sacrifice that the happy valleys of their home land might be kept sacred from the ravage of the invader

전쟁은 즉시 개인 개인 매일의 일상에 깊게 파고들었다. 몽고메리는 매일같이 구독하던 The Globe 신문에 실린 전쟁 기사를 꼼꼼하게 읽었고, 그녀의 일기에는 100페이지가 넘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전쟁 중 주요 작전 진행 사항들이 기록되어 있고 그 전쟁이 자신과 이웃들에게 미친 충격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1차 세계 대전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은 일기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5권으로 묶여 나온 그녀의 Selected Jounals Volume 2가 이 때에 해당한다. 다음은 1914년 8월 5일 일기의 한 구절이다.

England has declared war on Germany! Good God, I cannot believe it! It must be a horrible dream. It has come up like a thundercloud (SJ II, p.150)

이렇게 전쟁이 시작되었다. 모드 여사는 전쟁이 쉽게 끝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일기의 내용들을 보면 당시의 보통 사람들이 그랬듯이 그녀 역시 아군과 적국의 전쟁을 善 과 惡의 구도로 전쟁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흔히들 인용하는 1918년 10월 6일의 일기를 보면 아침부터 추적추적 가랑비가 뿌려 우울했던 기분을 단번에 날리고 환호하게 했던 전화벨소리에 이은 종전 소식을 적어 놓은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It should be written in capitals - in letters of gold. (...) We were sitting in the parlor reading when the telephone rang. I went - but - could hardly believe my ears when I heard the message Mr. Harwood was phoning up. I dashed into the parlor. "Aunt Annie", I exclaimed, "Germany and Austria are suing for peace on President Wilson's terms." (SJ II, p.269)

100페이지가 넘는 1차 대전의 이야기는 각각의 주요 전투 소식을 접하면서 느꼈던 공포와 전율을 잘 담고 있고, 앤 시리즈의 8번째에 해당하는 동서문화사 버전으로는 <아들들 딸들>로 번역된 <잉글사이드의 릴라(Rilla of Ingleside)>에서는 이 일기에서 나타나는 4년간의 전쟁 기간동안 일상 생활속에 스며든 애국적인 영웅주의가 직접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전쟁 이야기가 다루어진 그녀의 전쟁 소설 중에서는 세번째 작품이고 주인공인 Bertha Marilla "Rilla" Blyte 즉 릴라는 1889년인 앤이 33살 때에 태어났다. 이야기는 1914년, 바로 1차 대전이 발발한 릴라가 15세인 시점에서 시작된다.
1차 대전 당시의 캐나다 후방의 생활사에 대해서 여성에 의해 기술된 유일한 작품이기 때문에 그녀의 일기와 이 소설 그리고 당시의 기사들을 잘 모아 놓은 스크랩북은 1차 대전 당시의 캐나다 역사 연구에 너무나도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문건으로는 미국의 종교적 다원론에서 비롯된 불평등의 근원적인 문제랄지 근대부터의 광고들을 통해 본 미국의 여성들에 대한 연구 자료를 냈던 Vanessa Lengert 의 < How World War 1 changed the lives of canadian women>에서도 1차 대전 전후의 캐나다 여성들의 삶의 변화에 대한 논지를 펴면서 중요한 사료로서 <잉글사이드의 릴라>를 분석하고 있다.

두 소설 모두 근간에는 전쟁의 충격과 그 안에서의 인간들, 삶의 문제 그리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되어야 하고 계속되는 삶, 아무일도 없었다든 듯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우박사님이 말씀하신 철학적인 연결고리가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디서든 앤과 모드 여사 이야기가 슬쩍 비추어져도 반가운데 잘가는 블로그에서 앤의 이야기가 다루어져서 반가워서 몇자 적어 보았다. 1차 대전은 모드 여사 개인의 삶에서도 전환기를 의미하는데 이때를 경계로 그녀의 작품들은 전쟁 전에 비해 급속하게 인기를 잃게 된다. 세상의 현실이 바로 전쟁전의 이상적 가치관을 갖고 살기에는 너무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다른 작가들은 이미 전쟁의 공포와 인간 본성 깊은 곳의 어두움등에 대해서 솔직하고도 직선적으로 쓰고 있었고 독자들로부터도 공감과 신뢰를 얻어가던 중에도 모드 여사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해피엔딩의 아름다고 즐거운 이야기를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즈음부터 개인적으로는 남편 이안의 정신병으로 끝을 알 수 없는 절망 속에 매일 매일을 살아가고 있었기에 자신이 쓰는 이야기 속에서라도 이상적인 삶을 그려야 하지 않았을까.

나는 가장 유명하고도 행복한 이야기인 1권 <빨강머리 앤>, 2권 <젊은 날의 앤>, 3권 <달콤한 첫사랑> 셋트 외에 1939년 그녀의 최후의 작품인 6권 <잉글사이드의 앤>을 가장 높이 평가하고 싶다. 좋든 싫었든 평생을 함께 했던 작품과 캐릭터로서의 앤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담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잘 드러나 있다. 대학도 경험했고 교편뿐 아니라 뉴스페이퍼 우먼으로 작가로 스스로 경제적인 자립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으면서도 홀로되신 할머니를 위해 포기하고 또 작가인 부인을 탐탁히 여기지 않았던 근엄한 장로파 목사의 부인으로서 가정으로 돌아와 엄마로서 사모로서의 봉사의 삶을 강요받을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모습이 수다스럽고 상상력 풍부한 아이로서의 앤도 이상적인 선생상으로서의 앤도 멋진 여대생을 걸쳐 존경받는 교장 선생으로서의 이상적인 여성상이 아닌 비릿한 인생의 맛을 아는 중년의 앤 셜리의 애틋함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덧글

  • 우석훈 2008/07/06 19:44 # 삭제 답글

    아, 재밌게 읽었습니다. 제가 <반지의 제왕>과 <빨간 머리 앤>을 하나의 텍스트로 보는 분석점은, 전쟁 이야기 말고도, 톨킨이 많이 차용하였던 켈트의 옛 신화와 사유적 방식, 그리고 이교도적인 속성과 켈트가 녹아들어간 몽고메리의 은유와 묘사들, 그래서, 켈트 전통이 중간 고리입니다.
  • 다음엇지 2008/07/06 20:08 #

    방문 감사드려요! 생각지도 못했는데 덧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군요! 말씀하신 대로 켈트적인 요소는 프린스 에드워드 섬과 앤의 인종적 근본 자체의 정체성이기도 하죠. 그러고 보니 그렇게 연결 짓는 것도 가능하겠습니다. 궁금증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로맨티스트 2008/07/07 13:07 # 삭제 답글

    동서문화사는 사기 이벤트로 앤 세계를 어지럽게 한 죄로 절판이 가한줄로 생각합니다.
    재단쪽에 저작권료나 다른 어떤 것도 안냈어요. 그래서 앤의 고향에 전시도 안되고 있죠.
  • 다음엇지 2008/07/07 13:11 #

    그래서 섬에서 전시하는 것이 80년대 나온 양장판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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