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제이 굴드의 Evolution 서문 by 다음엇지

Evolution

스티븐 제이 굴드
하버드대학교 비교동물학 박물관


진화론 초기에 나온 유명한 이야기(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진화가 과학과 인간 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하고 핵심적인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영국의 상류사회 여성이 있었다. 아마도 귀족이나 주교의 아내(영국 국교인 성공회에서는 성직자도 결혼을 한다)였던 모양인데 진화론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알게 되자 남편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여보, 다윈이라는 사람 얘기가 틀렸기를 바랍시다. 하지만 옳다면 널리 알려져서는 안 돼요!"

과학자들은 낡은 생각의 고루함과 끈질김을 비웃기 위해 이 이야기를 자주 인용한다. 특히 혁명적인 사실을 상류사회가 판도라의 상자 안에 가둬 놓으려는 모습은 웃음거리가 되나. 그래서 이 이야기의 여성은 고루한 어리석음의 표보능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이 서문의 윤곽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녀를 '예언자'라고 부르려 한다. 다윈의 이야기는 분명히 옳지만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그렇다. 다른 서구 세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런 기이한 상황이 왜 발생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사실로서의 진화

과학의 임무는 두 가지다. 실험을 통해 자연계의 특성을 밝히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과 세상이 왜 지금처럼 돌아가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다른 방법도 많이 상상할 수있는데 왜 하필이면 지금 우리가 보고 겪는 것 같은 방법으로 돌아가는가? 이 두 가지를 달리 말하면 사실을 집어내고 이론을 확인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이 자주 이야기하는 것처럼 과학은 절대적 진리를 밝혀낼 수는 없다. 그러므로 과학자의 결론은 항상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게 건강한 회의주의가 반드시 허무주의의 영역가지 확장될 필요는 없다. 어떤 사실들은 충분히 입증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지구가 납작하지 않고 둥글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지구는 거의 완전한 공 모양으로 되어 있고 이 사살은 충분히 잘 증명되었기 때문에 나는 과학 강의를 하면서 평평한 지구에 시간을 별로 할애하지 않거나 전혀 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생물학의 기본 개념인 진화론도 마찬가지 수준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에 진리라고 부를 수 있다.

진화가 사실임을 논의함에 있어서 우리는 다윈이 그랬던 것처럼 구분을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구분이란 진화의 단순한 '사실'(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혈통을 갖고 있고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나왔으며, 어떤 계통의 역사란 곧 세대가 바뀌면서 유전적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이라는 등의 사실)과 '이론' 사이의 구분이다. 여기서 '이론'이란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처럼 진화론적 변화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것을 말한다.

진화가 사실임을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크게 3가지 범주로 나뉜다. 첫째, 사람이 직접 관찰한 결과이다. 물론 1859년 <종의 기원 Origin of Species>이 출간된 이후 이 이론에 따른 관찰도 이루어졌지만 인간은 그 전부터 교배를 통해 곡물과 가축을 개량해 왔고, 그 결과 지질학적으로는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소규모의 유전적 변화에 대해 정밀하고도 방대한 자료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공장에서 뿜어낸 검댕에 노출된 나방의 날개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색이 변하는 것, 갈라파고스에 사는 핀치의 부리 모양이 기후와 먹이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 항생제에 대해 내성을 갖는 수많은 박테리아 변종 등 우리에게 친숙한 예는 많이 있다. 이렇게 작은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은 심지어 창조론자들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런 작은 변화가 지질학적 시간에 걸쳐 축적되어 새로운 종의 탄생으로 이어졌다는 증거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화석의 기록을 통해 큰 변화와 변화 사이의 중간 단계에 대한 직접 증거, 그러니까 두 번재 범주의 증거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중간 단계의 생물종은 없으며 고생물학자들은 그저 진화론의 독단에 바져 이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지 않거나 '화석의 기록이 불완전해서 과거에 틀림없이 존재했을 중간 단계의 종들이 보존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화석의 기록은 불완전하지만(역사적 기록 치고 완전한 것은 거의 없다) 고생물학자들은 끈질긴 노력 끝에 중간 단계의 종들(단순한 중간 형태의 개체들이 아니라)에 해당하는 훌륭한 예를 많이 찾아냈다. 이들은 적절한 시대순에 따라 그들의 조상과, 그들과는 아주 달라진 후손들을 연결해 주었다. 이런 예는 조상인 육상 포유동물로부터 암불로세투스(Amblulocetus, 학명으로 '걸어다니는 고래' 라는 뜻) 등 몇 가지 중간 단계를 거쳐 진화한 고래, 뛰어다니는 조그만 공룡으로부터 진화한 조류, 파충류를 조상으로 둔 포유류, 지난 400만 년 동안 뇌의 용적이 3배가 된 인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좀 간접적이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증거가 있다. 오늘날 모든 생물체는 이상한 부분과 불완전한 부분을 갖고 있는데, 이는 조상들이 갖고 있던 어떤 상태로부터 다른 부분들은 변화(즉 진화)했는데 이것만 그대로 남은 것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부분이다. 이런 현상은 생물학적 진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더 이상 이용되지 않는 철도가 있다고 하자. 여기서 우리는 이 철도가 여러 개의 도시를 연결했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철도의 존재 이유가 없다. 농경사회에 어원을 둔 많은 단어들이 오늘날의 산업사회에서는 매우 다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방송하다'의 뜻인 'broadcast'는 시를 한 줌씩 집어서 뿌리는 것을 뜻한다. 'pecuniary'는 '금전상의' 라는 뜻인데 원래는 가축(재산)을 의미하는 단어로, 소라는 뜻의 라틴어 단어인 'pecus'에서 왔다. 마찬가지로 모든 생명체들은 과거에는 어떤 기능을 했지만 오늘날은 쓸모없는 유물들을 가지고 있는데, 과거에는 모습이 달랐던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어떤 종류의 고래는 피부 밑에 다리뼈의 흔적을 감추고 있고, 어떤 뱀은 기능이 없는 골반뼈 조각을 갖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그들의 조상이 갖고 있던 다리의 흔적이다.

진화론을 받아들이기 힘겨운 이유

확신 속에서 안락하게 살던 인류를 뒤흔든 과학적 발견은 많지만 다윈의 진화론만큼 심하게 흔든 것은 없다. 이에 도전할 만한 것이라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발견 정도라고 할까. 이들은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서 떼어내 태양의 주위를 도는 변두리 행성이라는 지위로 끌어내렸다. 그러나 이들의 발견은 우리가 사는 곳에 대한 개념을 바꿔 놓았을 분이지만 다윈의 이론은 인간 자신의 의미와 본질에 대한 시각에 혁명을 일으켰다. 우리는 누구인가? 어떻게 해서 이곳에 나타났는가? 우리와 다른 생물들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진화론은 어떤 자비로운 신이 인간을 자신의 모습에 따라 창조해서 지구와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게 했고, 지구의 역사 중 인간이 지배자가 아닌 기간은 첫 5일간뿐이었다는 믿음을 냉혹한 과학적 설명으로 대체했다. 진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가지가 무성하게 뻗고 크기가 거대한 생물계라는 나무에 달린 작은 가지에 불과하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계속 자라고 있는 이 나무의 가지들은 조상-후손 관게로 모두 서로 얽혀 있다. 게다가 호모 사피엔스라는 특이하고 조그마한 가지는 지질학적으로 보면 바로 어제 뻗어 나온 것이나 다름없고, 유구한 생명의 역사와 비교하면 인간이 존재해 온 기간은 눈 깜짝할 사이 정도이다(호모 사피엔스는 10만년 전 쯤에 출연햇고, 살아있는 종 중 인간에 가장 가까운 침팬지로부터 갈려 나온 것도 600~800만 년 전에 불과하다. 반면 이제까지 발견된 박테리아 화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36억 년 전의 것이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출연했어야 하며 다른 생물들보다 우월하다는 과거의 믿음을 뒷받침하는 진화 이론을 찾아낼 수 있다면 방금 말한 것 같은 엄청난 사실을 감당하기가 좀 쉬울지도 모른다. 과거의 잘못된 믿음이란, 진화는 예견할 수 있는 과정을 따라 전진하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출현은 불가피하고 진화의 정점을 이루는 사건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진화의 메커니즘에 관해 우리가 가장 선호하는 이론(앞에서 말한 진화의 단순한 사실 말고)을 동원해도 과거의 믿음 속에 안주할 방법은 없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도 인간의 필연성이나 중요성에 대한 믿음을 뒷받침해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과학적으로 옳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진화론은 발표된지 150년이 지났는데도 세계에서 가장 기술적으로 앞선 미국에서는 널리 알려지지도 받아들여지지도 않고 있다. 이는 미국에서 다윈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고, 특히 그의 주장이 우리의 영신적 희망과 필요에 역행하는 암울한 것(사실은 윤리적으로 중립적이고 지적으로 탁월한데도)이라는 오해를 받고 있어서 일반 대중이 이 생물학적 일반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윈적 진화론, 그러니까 진화에 관한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진화론이 함축하는 의미가 왜 널리 알려지지 못했는가를 설명해 볼까 한다.

사람들이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개념이 복잡하기 때문이 아니다. 위대한 이론이 이처럼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는 예는 드물다. 이 이론은 세 가지의 명백한 사실과 이에 기초한 논리적 추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실화가 생겼다. 토머스 헨리 헉슬리는 <종의 기원>을 읽고나서 "내가 자연선택을 생각해내지 못했다니 참 어리석군!" 이라고 했다고 한다. 세 가지 사실은 이렇다.

첫째, 모든 생명체는 실제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수의 자손을 낳는다.
둘째, 같은 종에 속하는 개체들이라도 저마다 다른 형질을 갖는다.
셋째, 이런 형질 중 적어도 일부는 자손에게 전달된다.

자연선택의 원리는 이 세 가지 원리 만으로도 바로 추론될 수 있다. 일부 자손만 살아남는다는 것은 평균적으로 보아 운 좋게도 주변 환경에 잘 적응하는 형질을 이어받은 개체들이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좋은 형질을 가진 개체가 살아남아 자손을 얻으면 그 자손은 평균적으로 보아 환경에 더 잘 적응하는 형질을 가진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 간단한 메커니즘의 이해 여부가 아니라 광범위하고도 근본적인 철학적 충격파에 있다. 이것은 다윈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진화론은 자연이란 조화롭게 진보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본질적인 목적이 들어있다는 편안한 생각으로부터 사람들을 끌어내서 인과율과 마주 세웠다는 얘기다. 다윈이 제시한 메커니즘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무 방향성 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국지적 적응만을 가능하게 해주므로, 생명의 역사에 진보의 개념이나 방향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다윈의 이론체계에 따르면 해부학적으로 너무 퇴화해서 숙주의 조직 일부로 전락해 버렸다고 할 수 있는 기생생물도 훌륭히 적응한 사례가 되며, 미래의 성공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에서 초원을 자유로이 뛰노는 민첩한 야생동물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어떤 생물이 좋은 형질을 갖고 있을 수도 있고 환경도 호의적일 수 있지만, 생명 현상의 핵심적 부분은 각 개체가 번식을 위해 벌이는 무의식적인 투쟁에 의해 전적으로 지배되지 더욱 고차원적인 선(善)을 향해 작용하는 명백한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다.

다윈의 메커니즘은 처음에는 음울하게 보이지만, 깊이 들어가면 두 가지 기본적 이유 때문에 자연선택(그리고 단속적인 평형으로부터 대량 멸종에 이르는 다양한 진화의 메커니즘)을 받아들이게 된다. 자연의 진정한 메커니즘을 알면 우리는 질병의 치료법을 알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박테리아 등 질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이 어떻게 진화하는가를 알면 우리는 이들이 항생제에 대한 내성을 어떻게 개발하는가를 이해하고 이를 무력화시킬 수단을 찾아 낼 수 있다. 에이즈 바이러스의 변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인종들이 갈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 극히 최근의 일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리하여 인종을 갈라놓는 유전자의 차이가 아주 미미함을 안다면, 수세기에 걸쳐 인류를 괴롭혀 온 인종차별주의는 아무 근거가 없는 것임을 우리는 곧 알 수 있다.

둘째, 정신이 번쩍 나는 다윈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현실을 직시하면 드디어 해묵은 헛된 희망을 버릴 수 있게 된다. 즉 현실의 자연이 인간의 우월성을 확인해 주어 삶의 의미를 부여해줄 것이라거나, 인간이 생명 현상의 궁극적 정점임을 증명해주리라는 희망 말이다. 기본적으로 자연은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 삶의 의미는 무엇이어야 하는 가"를 가르쳐줄 수 없다. 왜냐하면 가치와 의미에 관한 이런 윤리적 의문은 종교, 철학, 인문과학 등 인간 생활의 다른 분야에 속하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가 다른 분야를 통해 어떤 결정을 내리면 자연은 우리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살 권리,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 천부의 인권이 있음을 인정하고 나면 인종 사이의 사소한 유전적 차이를 아는 것이 오히려 인류 공동체의 통일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과도 같다. 아무리 그럴싸해 보여도,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리고 가끔 불가피해도(예를 들어 노화나 죽음) 사실은 사실일 뿐이고, 윤리적 정당함이나 영신적 의미 같은 것들은 사실과는 다른 영역에 속해 있다.

자연 속에 우리의 희망이나 위안이 간직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에는 인간에게 모든 것은 밝고 아름다웠으며 모든 것이 우월한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그런 것' 과 '그래야 하는 것'을 혼동하는 오류에 빠졌다. 그러나 진화를 사실의 측면에서 보고, 생명의 놀라운 다양성과 그 변화 과정을 자연의 시각에서 보고, 호모 사피엔스가 무성한 생명의 나무에서 조그만 가지 하나에 불과함을 이해한다면, 드디어 인간은 자연 속의 사실과 메커니즘을 이해하려는 과학적 탐구를 통해 도덕적 진리와 영신적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을 그만둘 수 있을 것이다. 다윈은 사실에 입각한 생명관의 위대함(<종의 기원>의 마지막 문구를 인용하자면)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을 '자연에게 너무 많이 요구하는' 상태에서 해방시켰고, 그 결과 과학 탐구과정에서 놀랍고도 무서운 사실을 알아낸다 해도 이런 무서운 일이 도덕과 의미의 추구를 위협할 수 없고, 도덕과 의미는 우리 자신의 윤리 의식에서 나온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자유로이 탐구에 뛰어들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트랙백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TrackbackURL : http://ignorams.egloos.com/tb/4153291 [도움말]
  • What Does it Mean to Be a Radical? 2009/01/07 16:55 #

    Stephen Jay Gould - 래디컬 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What Does it Mean to Be a Radical?) by Raicahrd C. Lewontin and Richard Levins (원문) 올해(2002년) 초 , 스티븐 굴드(Stephen Gould)는 폐암이 급속하게 퍼져서 악화 되었고 살아날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2002년 5월 20일 60을 일기로 그는 우리 곁을 떠나갔다. 20년전, 그는 석면 노출...... more

  • 차별을 생산한 과학…인간에 대한 오해 2009/02/08 13:45 #

    “빈곤의 비참함이 자연법칙이 아니라 우리들의 사회제도에 의해 비롯되었다면, 우리의 죄는 중대하다”(다윈의 비글호 항해기 중에서).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사회평론) 개정판 서문에서 저자는 다윈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이 문구는 생물학적 결정론에 대한 저자의 비판을 가장 축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각 부분에서 시대별로 제기되었던 생물학적 결정론의 허구..... more

덧글

  • 로망 2008/02/14 13:55 # 답글

    위글은 미국 기준이죠..

    동양에서는 진화론을 너무 잘 받아들여서 놀랍다고 하겠죠..

    굴드가 자폐아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는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 다음엇지 2008/02/14 15:28 # 답글

    로망/ 어서오세요. 넵, 사실은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한데 그게 어렵네요. 저도 조카 한명이 자폐랍니다.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세상을 보고 소통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실제로도 그러고 있습니다. 템플던 그랜딘의 책들로부터 많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덧글 입력 영역



Twi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