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판을 떼어냈기 때문일까요.
『남대문. 국보 1호. 서울특별시 남대문로 4가 소재. 원명 숭례문(崇禮門). 1395년(태조 4년) 성곽의 축성과 동시에 기공하여 1398년(태조 7년) 2월에 낙성되었다. 현재의 건축은 1447년(세종 29년)에 개축한 것으로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 중에서 가장 오랜 것이다』(새국사 사전, 남대문)

마침 지난 금요일 2월 8일은 바로 숭례문이 창건된지 610년이 되던 날이었습니다. 숭례문의 창건일이 2월 8일이라는 것은 1962년 2월 3일 남대문 해체 작업 중에 발견된 남대문 상량문 사본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이 상량문에 따르면, 도성 남문 상량이 1396년 10월 6일에 이루어졌고, 1398년 2월 8일에 완성되었으며, 보수 상량은 1448년(세종 30년) 3월 17일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죠. 이조실록에는 보수상량이 1447년(세종 29년) 8월에 명령이 내려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그 명령을 받은 감독이 이듬 해인 1448년 3월에 상량을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었던 건물이었습니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3월의 숭례문

서울에 현존했던 목조 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었던 숭례문은 하층을 화강암으로 구축하고, 중앙의 홍예문을 중심으로 견고한 외관을 가진 성문으로서, 5간 2면의 누각을 가진 웅장한 형태의 2층 건물이었습니다. 대문 양쪽에 성벽을 허물어 길을 낸 것이 1908년이고, 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곳을 1956년에 보수하였고, 1962년에 전면적인 개축을 한 것이었습니다.

주변에 공원을 조성한 후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완전 개방한 것은 2005년 5월 27일의 일(맨 위의 사진)이었고 결국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살아남은 이 귀중한 문화재에 대한 서로의 무관심에 의해 참담한 아침을 맡게 되었습니다.
2008.2.10. 현판을 떼는 모습과 일부 훼손된 현판의 모습

불이 나자 현판 훼손을 염려해서 현판을 떼어냈다고 하죠. 떼다가 떨어뜨려 훼손된 사진도 이미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건물의 현판은 보통 가로쓰기에 3자 내외인데요. 이 崇禮門 이라는 현판이 세로로 씌인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태종때 중건하기 시작한 남대문은 조선 시대에도 2~3번 화재가 있어 내실이 불에 탔다고 합니다. 밸리에 보니 이에 대한 조선왕조 실록 기록을 찾아 보신 분이 있더군요.

태종 15년(1415), 큰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숭례문 안의 행랑이 무너졌다. 태종은 이를 다시 고쳐 지으라 명하면서 "행랑이 기울고 무너졌으니, 이는 단단히 짓지 못한 탓이다. 일을 위임하였는데 마음을 다하지 않았으니 가당키나 한가?" 라고 공사 책임자인 박신을 나무랐다. 그리고 "지난해에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물을 허비하여 지었는데, 지금 이와 같으니 어찌 구원(久遠)한 계책이겠는가? 또 지금 다시 짓자면 어떤 사람을 역사시킬 것인가?" 라고 탄식하며 책임자를 옥에 가두는데, 3일후 석방하여 다시 그들을 공사에 종사하게 했다.

성종 14년(1483), 숭례문 안 행랑에 불이 나서 십여 간(間)이 연소(延燒)되었다.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고,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과 성종 10년(1479)에도 보수되었다.


이에 세종 때 현판을 세로로 길게 늘어뜨려 성문 밑을 막고 눌러 화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숭례문의 화기는 2가지 설이 있는데 경복궁과 마주보면서 불의 산(火山)이라 일컬어지는 한양 남쪽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다스려야 했기 때문에 광화문 앞의 해태상과 함께 숭례문의 두 글자가 불꽃을 의미하기 때문에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도록 균형을 맞추도록 했다는 것과 숭례문을 지나서 좌측에 있던 남지(南地)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이는 남대문이 정남향을 하고 있고 이위화(離爲火)라해서 화기를 띠고 있으므로 그것을 누르기 위해 문 밖에 연못을 파고 문명을 숭례문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숭례문 현판 편액의 필자에 관해서도 <지봉유설>에는 양녕대군이 썼다고 되어 있어 정설이지만, 글씨체가 명필로 불리던 세종의 세째 아들 안평대군의 필체라는 설도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엔 이 현판을 잃어버린 일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몇년 뒤인 광해군시대 어느날 밤, 지금의 서울 청파동 한 도랑에서 서광이 비치기에 파보았더니 숭례문 현판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아무튼 현판은 떼어졌고, 이후에 우연처럼 남대문이 전소되었습니다. 이미 무너져 버린 남대문을 보면서 책임 소재는 이미 의미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물론 복원은 되겠지만 모조품에 불과하겠지요. 아니 같이 무너져내려 버린 우리의 정신과 자존심과 이 슬픔을 복원할 수 있는 걸까요. 새국사 사전에 나와있는 서울에 남아있는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설명은 현재가 아닌 과거가 되어 버렸습니다. 남대문은 오늘 자신의 몸을 태우면서 말해 주었습니다. 새로운 것, 편한 것, 발전에 대한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과거를 순수하게 바라보고 인정하며 그것을 기반으로 앞으로 걸어 왔는지 아니면 단순히 새로워 보이는 것을 향해서 도피만을 일삼고 있었는지 말입니다.

과거의 남대문의 모습들과 2008.2.11 아침의 남대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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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음엇지 | 2008/02/11 11:39 | 엇지의 세상 마주하기 | 트랙백(2)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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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로맨티스트 빨강머리 앤.. at 2008/02/11 15:03

제목 : 남대문의 火
우리 문화재의 현주소와 정치, 사회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화재였습니다. 이번 화재에서도 역시 예언자는 있었습니다. --------------------------------------- 존경하는 장관님 김영훈 2007/02/24 친애하는 관리자님. 이 글.....more

Tracked from zagni's me2DAY at 2008/05/14 04:32

제목 : 자그니의 생각
현판을 떼어냈기 때문일까요...more

Commented by ExtraD at 2008/02/11 12:17
대조되는 사진이 정말 ..
Commented by 다음엇지 at 2008/02/11 13:50
ExtraD/ 그 세상 어떤 문보다도 아름답고 품위있었던 문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서울로 들어오는 화기를 눌러주던 문이 무너졌으니 서울은 누가 지키지요.
Commented by 로맨티스트 at 2008/02/11 15:02
현판이라도 건졌으니 참 다행스럽습니다. 귀중한 인명이 희생된 것이 아니라는 점도 다행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앞으론 수시로... ㅠㅠ
Commented by supavista at 2008/02/11 17:34
진짜 울컥하네.에이 XXX들!!!
Commented by 모노리스 at 2008/02/11 17:53
화기를 막기 위해 지은 건데 불에 타버렸으니 좀 아이러니 하죠.
Commented by 수유 at 2008/02/11 23:01
참혹하네요. 섬뜩하기도 하고.
Commented by 다음엇지 at 2008/02/12 07:46
supavista, 모노리스/ 어서오세요. 흠 화기를 누르지 못하면 가뭄이나 분란등이 일어난다고 믿었었죠. 절대로 액땜정도로는 보이지 않네요.

수유/ 곁에 있으면 느끼지 못한다고, 다시 보니 아름다운 문이었다는 게 새삼스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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