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거미줄


거미로 하여금 저 거미줄을 만들게 하는
힘은 그리움이다

거미로 하여금 거미줄을 몸 밖
바람의 갈피 속으로 내밀게 하는 힘은 이미
기다림을 넘어선 미움이다 하지만
그 증오는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어서
고요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팽팽하지 않은 기다림은 벌써
그 기다림에 진 것, 져버리고 만 것

터질 듯한 적막이다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


이문재님의『산책시편』中

"헉.."

깜짝놀랐다.
타이핑을 하고 있는 손등 아래로 짙은 회색의 거미 한마리가 8개의 잰다리를 움직이며 지나간다.
잠시 가슴을 쓸어내린 후에 재빠르게 책상위를 검색한다. 지난주에 새로 받은 투명한 플라스틱 명함 케이스가 눈에 들어온다. 재빨리 뒤집어 옆면이 뚫려 있는 뚜겅에 명함들을 옮기고, 네면이 모두 같은 높이의 케이스로 거미를 가둔다. 그리고 다시 뚜껑을 가져다가 조심스럽게 덮어서 이제 거미는 완전히 명함 케이스 안에 갖혔다.

놀란듯이 사방팔방 재빠르게 탐색하고 갑자기 작아진 세상에 순응한 것인지 생각에 빠진 것인지 구석에 가만히 멈춰있다.
잠시 이 놈을 바라보고 있자니 여러가지 상념이 떠오른다. 녀석은 이 작아진 세상에서도 거미줄을 칠까?

자의건 타의건간에 사람들은 자신만의 거미줄로 손을 묶고 다리를 묶고 목을 감고 자신을 옥죄고 있는지 모른다. 세상 모든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자신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은 자신을 찾지 못한 채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나 역시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온 시간만큼 나를 동글게 말아서 결국 나중에 먹기 위해 거미줄로 말아 놓은 먹이들처럼 어딘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지도 모르죠.

잠시 거미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처음부터 눌러 죽이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놓아주어도 이 커다란 사무실에서 살아가기는 쉽지 않으리. 회의실로 들어간다. 회의실 창문 밖이 수풀이기 때문이다. 창문을 열고 케이스를 열어 거미를 놓아준다. 다시금 큰 세상으로 나온 거미는 나뭇잎 위에서 잠시 멈춰있더니 이내 어두운 가지 사이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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